< 물시 >   나 옷 벗어요 그다음도 벗어요   가고 가고 가는 것들 아름다워서   주고주고 주는 것들 풍요로워서   돌이킬 수 없어 아득함으로 돌아갈 수 없어 무한함으로   부르르 전율하며 흐르는 강물   나 옷 벗어요 그다음도 벗어요       < 해벽(海璧) >   눈물이 우리들 첫 숟갈의 밥이었던 것은 알지만 그것이 바다가 되어 지상을 칠 할고도 반이나 덮어버린 것은 아무래도 잘 모르겠다   사람의 가슴마다 물결인 것은 아무래도 잘 모르겠다   저 많은 눈물을 누가 다 흘렸을까 한껏 차오르다 기어이 무너지는 낮과 밤 밀려가고 밀려오는 미친 술병들의 바다 거대하게 떠밀리는 언어의 물거품들   어느새 다 마시고 어디로 떠났을까 아무래도 잘 모르겠다     < 미로 >   어떤 그리움이 이토록 작고 아름다운 미로를 만들었을까요   별 하나가 겨우 지나가도록 별 같은 눈빛 하나가 지나가도록   어떤 외로움이 강물과 강물사이 꿈같은 다리를 얹어 발자국 구름처럼 흘러가도록   그 흔적 아무 데도 없이 맑은 별 유리처럼 스며들도록   가면 속 신비한 당신의 눈빛이 나만 살짝 찾을 수 있도록   어떤 사랑이 이토록 실핏줄 살아있는 골목을 만들었을까요         < 미친 약속>   창밖 감나무에게 변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풋열매가 붉고 물렁한 살덩이가 되더니 오늘은 야생조의 부리에 송두리째 내주고 있다 아낌없이 흔들리고 아낌없이 내던진다   그런데 나는 너무 무리한 약속을 하고 온 것 같다 그때 사랑에 빠져 절대 변하지 않겠다는 미친 약속을 해버렸다   감나무는 나의 시계 감나무는 제자리에서 시시각각 춤추며 시시각각 폐허에 이른다   어차피 완성이란 살아있는 시계의 자서전이 아니다 감나무에게 변하지 말라고는 할 수는 없는 일이다   ==> 사랑의 영원성에 대한 약속이 '미친 약속'인 것은 '사랑의 영원성'이란 무릇 사랑의 '조변석개의 영원성'이기 때문이다. 바람이 그렇고 계절마다 모습을 바꾸는 감나무가 그렇듯, 사랑이란 얼굴과 모습을 바꾸어도 끊임없이 찾아오는 어떤 것이다. "절대 변하지 않겠다는"약속이란 사랑의 실체를 사랑으로 간주하는 흙의 약속 살의 정념을 사랑으로 간주하는 불의 약속이다. 그러나 바람의 시인, 바람둥이 시인의 약속이란 저 끊임없는 물의 표현형식처럼 조변석개할 것이다. 그것이 그의 살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감나무와 나는 "시시각각 춤추며 시시각각 폐허에 이른다." 이 무한한 변화야말로 그가 사랑을 실천하는 형식이며, 그는 그렇게 해서 마침내 폐허에 이른다. 춤이 폐허에 이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춤이 허공을 품는다는 뜻이며, 시간의 형식이라는 뜻이며, 끝내 완성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폐허는 허공에 몸을 내준 건축물이다. 춤은 그렇게 바람(허공)을 제 안의 일부로 포함한다. 춤은 동작의 예술이므로 시간성에 속박되어 있다. 그것은 무소성을 특징으로 갖지만 무시간성을 갖고 있지는 않다. 춤은 시간에 얹혀야 비로소 현현된다. 모든 변화의 끝은 폐허이므로 춤은 무한히 폐허를 향해 간다. '무한히 간다'에 주의하라. 그것은 종국, 궁극, 파국에 이르지 않는다. 차라리 끝자리에서 마주치게 될 폐허를 현재에 끌어당겨, "시시각각" 폐허를 현션시키믕로써 그것을 연기(延期)하는 형식이 춤이라고 하는 것이 사정에 맞는다. 그것은 미완이고 제한적이지만, 바로 그때문에 무한하다. 시인이 사랑의 실패와 슬픔의 열정을 말하되, 사랑의 완성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 길 잃어버리기>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나의 자리인가요 탑처럼 서서 듣는 저 종소리가 나의 시인가요 종소리 속의 쇠 울음, 짐승의 순간 애달픈 육체   기꺼이 길을 떠나 기꺼이 길을 잃어버린 대낮 시간이 탕약처럼 졸아든 고도(孤島)의 한가운데 길이 물이고 물이 길인가요   길을 잃기도 쉽지 않아 미로와 수로사이 그냥 이 자리에 있는 것도 길인가요   나는 외로움 부자, 자유 부자, 가난 부자 온몸으로 꽃 한 송이 눈부신 노숙   오직 허공을 머리에 인 가벼운 허영의 깃털인가요       < 길에서의 키스> 새들에게 배웠을 거야 가만히 서 있어도 아무나 그리운 가을 한낮 하늘 아래 태양과 어린아이만큼 아름다운 길에서 키스하는 저 연인들   부러질 만큼 허리를 꺾고 서로의 입속에 사는 새와 새가 만나 단숨에 심장까지 파들어가는 순간의 흡입   소나기 방금 지나간 숲에서 튀어나온 푸들거리는 젖은 입술들   어디쯤에 떨어졌을까. 나의 입술들은 어느 전통의 수쳇구멍을 어느 도덕군자의 바다를 떠돌고 있을까 천국도 지옥도 아닌 구천을 떠돌고 있을 머뭇거리고 눈치보고 망설이는 사이, 아깝게 시들어 버린   내 고통의 장미들 새들도 다 알고 있는 표현과 실천을 거짓으로 탕진해버린 전율하던 몸뚱이들     살이 흙에 가까운 물이라면 , 모래는 물에 가까운 흙이다. 물의 흐름을 제 몸에 새겨 길을 낸 것이 모래이기 땜누이다. "모래와 모래가 몸 부비는 소리" ([ 모래의 시]) 야말로 살을 찾아가는 물이 는 소리다. "길이 물이고 물이 길" ([ 길 잃어버리기])인 그런 물길이다. 모래가 열을 받아 응축된 것이 유리이므로, 유리는 또 다른 살이다 ==> < 유리 이야기 >   잠시 반짝이다 결국 깨어지는 유리가 사랑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래를 끓여 유리를 만드는 동안 천 도의 불꽃으로 타오르던 사랑이 거짓말처럼 얇은 한 조각 파편으로   산을 향해 돌거나 해를 향해 돌거나 결국 어딘가를 향해 돌고 도는 작은 심장을 유리로 한번 들여다보고 싶을 때가 있다   어찌하여 하는 유리를 믿지 못하는가 유리처럼 먼 곳을 투시해보고 싶은 목숨일 뿐인가 내 안의 신을 향해 내 안의 해를 향해 끝없이 묻는 것이 전부인가   망원경이 되어 별자리를 바라보고 하늘 중에서도 깊은 하늘을 항해하다 그만 깨지고 마는 유리를 닮은 내 사랑은 어찌하여 이리도 슬픈 두께여야 하는가     < 살아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은 파도처럼 끝없이 몸을 뒤집는 것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몸을 뒤집을 때마다 악기처럼 리듬이 태어나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암각화를 새기는 것이다 그것이 대단한 창조인 양 눈이 머는 것이다 바람에 온몸을 부딪치며 쉬지 않고 바위에게 흰 손을 내미는 것이다 할랑이는 지느러미가 되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순간마다 착각의 비늘이 돋는 것이다     < 이제 됐어>   이제 됐어! 도롱뇽 새끼처럼 연약한 동물로 태어나 제 발로 서서 걸을 수 있는 사람이 됐어 슬프게 기뻐 빛나는 고통이었어 위대한 빗금을 새겼어   때로 술통이 숨통이었지 하늘의 힘줄 뻗어가는 구름의 시간 미끄러운 신의 점액질처럼 푸른 이끼가 자라는 숲 속의 길들 고요를 머금은 폭설 속에서도 기필코 피는 꽃을 보아버렸어 수천의 이빨을 숨기고 떠 있는 솔개들을 알아버렸어   이제 됐어! 모든 사랑은 나중에 온 사랑에 지는 법* 어디로가야 할지 모르니까 그냥 가벼이 손을 흔들 거야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 사랑일까 더 이상은 진정 모르겠어!       < 고독사(孤獨死) > 고독고독고독을 고드름처럼 씹는다 그래도 고독사는 안 할 것 같다 낮에는 신열이 오고 밤에는 불면이 오니까   해변을 장악한 바람이 나를 흔든다 키를 맞댄 방갈로와 방갈로 사이로 몸에다 섬세하게 묘비명을 새긴 조개껍질들이 와작와작 굴러 다닌다 모래 무덤 사이로 별들이 악보를 들고 곧 떨어질 것 같다   고독고독고독을 고드름처럼 씹는다 그래도 고독사는 안 할 것 같다 낮에는 무위(無爲)가 오고 밤에는 망각이 오니까     < 얼어붙은 발*>   큰 거울 달린 방에 신부가 앉아 있네 웨딩마치가 울리면 한 번도 안 가본 곳을 향해 곧 첫발을 내디딜 순서를 기다리고 있네 텅 비어 있고 아무 장식도 없는**곳 한번 들어가면 돌아 나오기 힘든 곳을 향해 다른 신부들도 그랬듯이 베일을 쓰고 순간 베일 속으로 빙벽이 다가들었지 두 발이 그대로 얼어 붙는 각성의 날카로운 얼음 칼이 날아왔지 지금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구나! 두 무릎 벌떡 세우고 일어서야 하는 순간 하객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는 소리가 들려왔지 촛불이 흔들리고 웨딩마치가 울려 퍼졌지   얼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람처럼 사라져야 할 텐데 이 모든 일이 가격을 흥정 할 수 없이 휘황한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었네 검은 양복이 흰손을 내밀고 있었네   행복의 문 열리어라! 전통이 웃음을 흘리며 베일을 걷어 올렸네 난해한 행복이 출렁이는 바다를 향해 풍덩! 몸을 던지는 소리가 들려왔네 무사히 아름다운 혼례가 치러지고 있었네   *얼어붙은 발(cold feet): 겁, 공포, 달아나려는 자세, 결혼식 직전에 생기는 두려움이나 불안감으로 망설이는 것. ** 카프카.         < 도끼와 침대 >   지금 침대에 누워 울고 있다 눈물을 만난 김에 좀 더 별들을 포식하고 있다   눈물에 적시지 않고 태어나는 사랑은 없다   침대에는 칼라우라는 악몽이 숨어 있다 한다* 칼라우가 숨어 있기 위해 만든 것이 침대라 한다 칼라우를 만나지 않으려고 수도승은 평생 눕지 않는다 한다   지금 침대에 누워 울고 있다 밀렵꾼처럼 벌목꾼처럼 사랑을 벌목하고 있다 나를 벌목하고 있다   고목들 넘어 뜨리며 칼라우들이 달겨든다 눈물과 악몽이 만나는 침대에서 불끈불끈 시가 태어날 것 같다   지금 침대에서 사랑을 도끼질하고 있다       < 이빨 뽑는 사람 >   한 소설가의 전직은 발치사(拔齒師), 썩은 이를 시원하게 뽑아주는 직업 그런데 어느 날, 슬며시 보니 발치사보다 소설가가 돈을 더 버는 것 같아 그는 소설가가 되었다네 그럴듯한 거짓말을 써서 돈을 벌다니..... 이보다 더 발칙하고 재미있는 직업이 있을까   그런데 나는 그와 반대로 시인을 버리고 발치사가 되고 싶다네 사실 어렵기만하고 독자도 없는 시보다 썩은 아니 시원하게 뽑아주고 살 수 있다면 그것 참 발칙하고 재미있을 것 같네   방법은 간단하지. 여닫이 문고리에 무명실을 묶고 또 한쪽 끝에는 썩은 이를 묶은 후 문짝을 한 번 크게 열었다 닫으면 그 서슬에 이빨이 빠져나온다네. 달이 떴다지는 것보다 빠른 순간이지   밤낮 없이 써보아도 시원하지도 시큼하지도 않은 시대신 고인돌처럼 입속에 박힌 이빨 문고리에 실로 묶어 쑤욱! 쑤욱!문을 여닫으며 뽑아내버리고 (썩은 정치, 썩은 사랑, 썩은 TV, 썩은 돈, 썩은썩은썩은...., 강물, 인물, 건물, 똥물......) 그러고 돈을 받을 생각을 하니 벌써 시원하고 시큼한 바람이 내 입속으로 시구처럼 들어오네     < 물의 시집 >   사랑시는 물에다 써야 한다 출렁임으로 다만 출렁임으로 완성이어야 한다   위험한 거미줄에 걸린 고통과 쾌락의 악보 사랑시 한 줄의 이슬 방울들 저녁 물거품이 상륙하기 전의 꿈같은 신방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면 이윽고 썰물을 따라 가뭇없이 사라지는 물거품의 가락으로   사랑시는 물에다 써야 한다 물에서 태어나고 사라지는 물의 시집이어야 한다         < 두꺼비 집>   국수를 삶고 있는데 전기가 또 나갔다 한창 끓던 국수가 목화송이처럼 부풀었다가 허망처럼 시든다   전기가 햇살처럼 항상 흐르란 법은 없지 전기 없이도 르네상스는 눈부셨으니까   집주인 마누라에게 전화했더니 현관 벽 스위치들은 모두 위로 올리라 한다 위로 위로 치솟으라는 허황한 충고이다   허공의 스위치를 향해 손을 뻗치고 나는 한나절 높이뛰기를 시작한다   그래, 삶은 늘 두꺼비 같았지 삶은 국수 같았지 좀체 손이 닿지 않는 두꺼비집의 두꺼비를 잡으려고 허공으로 허공으로 치솟는 것이었지   아흐흐! 창자에서 터지는 화려한 폭발음 드디어 나에게 르네상스가 도래하려나     < 파도와의 동행> 눈썹 하나도 빼놓고 와야 할 먼 바닷길 한 사내가 따라왔다   그의 그의 그의 심장이 머리칼이 음성이 숨을 들이 쉴때 마다 내쉴 때마다 나를 철썩인다   시퍼런 근육이 꿈틀거리는 동굴 속 억센 숨소리가 먼 바닷길 그의 그의 그의 방황과 절망과 거짓이 그득하게 들이차고 나가곤 한다   이파도가 잠자면 여행도 끝이 날것인가 그의 그의 그의 심장이 지금 나를 뛰고 있다         < 잃어버린 반지 >   쇳소리 섞인 속도음이 캄캄한 하늘을 휘젓는다. 비행기는 베링해를 지니고 있다. 뒤쪽 화장실에서 반지를 분실하신 승객이 계십니다. 습득하신 분께서는 승무원에게 ......구만리 장천에서 누가 반지를 찾고 있다. 화장실 앞에 한 여인이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다. 넝쿨손을 허공으로 뻗치어 둥근 달을 건져다 그녀에게 끼워 줄수는 없을까. 반지 속 하늘을 찾아주고 쫑긋쫑긋 귀를 세우고 방아를 찧는 토끼도 찾아다 주고 싶다 허공에 뜬 사람들은 모두가 점성가이다. 반지 한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지구가 기우뚱 쏠릴때 마다 지상에 두고 온 반지를 떠올린다...... 구만리 장천에서 잃어버린 반지들이 울고 있다.       < 날벌레의 시 >   나는 한 번도 사랑에서 이겨본 적이 없다 싸앗처럼 온몸을 던질 뿐이다 그때마다 불꽃일 뿐이다   허공을 사랑한 것일까 아무것도 없는 벽! 돌진하는 순간 한 방울 야성의 핏방울이 전부이다   그것이 너에게 주는 나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