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향기는 아직 찻잔에 남았는데

지은이: 수완스님

펴낸곳: (주) 부크(BOOOK)

 

	<홀로 남은 집>   땅그림자의 음험한 눈빛이 거미처럼 다가오면 홀로 남은 너는 밤빛 보다 절박한 두려움에 떨고 있을 텐데   너를 떠나 객지를 떠도는 내 귓전에는 빗새소리 같은 네 흐느낌이 웅웅거린다   아직 돌아갈 기약은 별처럼 멀고 너에게로 향하는 마음 바람처럼 외롭다     < 산사의 새벽>   목탁소리로 똑, 똑, 똑 . . . 새벽 하늘에 낙점을 한다 아슴푸레한 박명이 살며시 고개를 내밀면 밤새 소곤거리던 별들 게으른 잠을 청하고 신선한 바람 한줄기 물빛 같은 의식을 깨운다.   불전(佛前)에 흐르는 향내음 시공을 넘어 아 -, 사바(裟 바)에 넘치는 향기여 충만이여 긴 호흡 법신에 한 몸 되는 순간 풀벌레 소리 하 - 얀 종소리 되어 새벽 하늘을 깨운다.     < 그리움>   가끔씩은 사람 사는 모습이 보고 싶다. 그 세상의 소리가 듣고 싶다.   낙루 되는 세월의 흔적들이 고달픈 삶의 어깨를 더욱 짓누르고 한치의 양보도 생각지 못하는 질긴 탐욕의 줄다리기가 긴장된 역사로 기록되는 곳을 떠나   인정이 숨결처럼 흐르는 세상 차향처럼 스며드는 맑은 이야기가 그립다.     < 버즘꽃>   한 삼십 번이나 한 오십 번이나 백 번이나...... , 천 번이나 아니 수만 번 곤두박질치고 곤두박질치고, 또 곤두박질치다 흘러가는 윤회의 물결 그 물결에 휩싸여 떠가는 버즘 먹은 애환들   목우물처럼 홈 파인 업의 자취   그 우물에 해인 삼매경에 든 꽃잎 하나 물 그림자 이고 떠 있다.       <  밤 >   밤이다   먹물풀린 냇물에 별들이 빠져 송사리처럼 헤엄을 친다       < 누가 해인을 보는가 >   옛날도, 아주 먼 옛날 소왈 말해서 천 이백 년쯤 된 옛날 도통한 스님 둘이서 내기를 했었지   "누가 바다 위에 가람을 세울 수 있는지"   순응은 가랑잎 띄우듯 물 위에 가람을 세우고 이정은 가랑잎 거두어 형상을 감춘 후 그림자만 물 위에 남겼지   홍조 띤 단풍이 시린 물 속으로 스며들 때 시흥에 취하고 술 익은 노을빛에 겨운 이들이 해인(海印)을 보았네   * 순응, 이정 : 해인사를 창건했던 스님들     <  풍경소리 > 기다림의 정적이 광겁의 시공을 넘어 풍경 소리로 머문 자리   떠남의 자취는 내일을 기약하기도 전에 바람처럼 흩어진다   그래도 인연사 아닌 것이 없기에 바람결에 스치는 아주 작은 속삭임일지라도 귀 기울여야지   다시 돌아오는 날 나의 자리는 일주문 밖 어디쯤인가에서 서성이고 있을 자비로운 어머니 관음의 품일텐데     <  이내의 끝자리 >   해질녘 서해 바닷가에 서서 바다가 하늘을 삼킨 이내의 끝자리를 보라   빈가슴에 일렁이는 물결이 되어 삼백예순 날 하루하루 그물질하며 건져 올린 물비늘 같은 한숨을 보라   갈매기 울음이 허기진 뱃고동 소리가 되고 한 세월을 접고 또 덥어도 접은 만큼의 삶을 되살아야 하는 회색빛 희망 해질녘 서해 바닷가에 서서 바다가 하늘을 삼킨 이내의 끝자리를 보라 피멍 든 가슴에 일렁이는 물결을 보라         < 장마 >   하늘이 식었는갑다 하루 몇 번씩 배탈난 맷비둘기처럼 구구되고 곰팡이 살 썩는 내 갯비린내로 코를 짓무른다   시집간 누이의 속내처럼 터져나는 설움 울컥이며 꺼이꺼이 흐느낀다   지질러 밟힌 땅에 가끔씩 해가 나와 미친년 측간에서 밑 보며 웃듯 땡볕으로 요사를 떤다   하늘이 식었는갑다 참말로 식었는갑다   * 식었는갑다 : 경상도 지역 방언으로 ' 미쳤다. 돌았다' 는 뜻으로 쓰임       < 만남 >   낯선 곳을 가다 문득, 낯익은 풍경을 보면 그것은 전생의 작은 파편을 보는 것입니다.   가을 길섶에 핀 쑥부쟁이 보랏빛 손짓 물빛 하늘 위로 떠가는 홀연한 구름 한여름 장대비 속을 등짐 지고 소고삐 쫒는   풍경 풍경들   낯선 곳을 가다 문득, 낯익은 듯한 얼굴을 보면 그것은 전생의 당신을 보는 것입니다.   하얀 눈이 산사의 뜨락에 적정 삼매의 만다라를 그리고 물 위에 비친 모습을 보면 그것은 당신의 내생을 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