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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한 사람들 / 최승호>
가난한 사람들이 아직도
너덜너덜한 소굴에서 살아간다
시커먼 연기가 솟고 소방차들이 달려왔을 때
무너지는 잿더미 앞에 울고 있는
아이와 노파를 나는 보고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 이런 변두리 인생들이 있다는 것
헌혈 플래카드를 큼직하게 내건
적십자혈액원 건물이 바로 옆에 있지만
가난한 피는 여전히 가난하고
궁핍에서 죽음에 이르는 길에 너절하게
불어나는 물건들이 있다는 것
그 누구도 물왕(物王)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넝마촌과 붙어 있는 고물상, 폐품들의 무덤
그 크기는 왕릉만하다
나는 그것을 고물왕(古物王)의 무덤이라고 불러본다
가난한 사람들이 손수레를 끌면서
오늘도 문명의 잔해를 나르는 곳, 그 입구를 지키며
엎드려 있는 검은 개는
스핑크스처럼
짖지도 않고 나를 보고 있다
< 인어(人魚)에 대한 상상 / 최승호>
지하철 양재역에서
말죽거리 시장쪽으로
하반신을 통째 고무가죽으로 싼 한남자가 포복한다
동전 몇 닢 담긴 그릇을
보도블록에서 보도블록으로 밀고 가는
그 느림은 지루하고
고통스럽다
양서류적(兩棲類的) 상상력에서
인어들이 태어났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반신이 물고기인 인어가 있는가 하면
물고기 대가리에 인간의 하체를 가진 인어도 있다
그 두 인어가 바닷가에서
결혼식을 올린다고 상상해보라
기념사진을 찍어도 그 부부만큼
그로테스크한 고독이 있을까
<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 김기택>
한 발짝도 움직일수 없어 답답할 줄 알았더니
일평생 꼼짝못하고 한 자리에만 있어 외롭고 심심한 줄 알았더니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실뿌리에서 잔가지까지 네 몸안에 나 있는 모든 길은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쉬지 않고 움직이는 그 구불구불한 길은
뿌리나 가지나 잎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나가는 너의 길고 고단한 길은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번개의 뿌리처럼 전율하며 끝없이 갈라지는 길은
괴팍하고 모난 돌멩이들까지 모두 끌어안고 가는 너의 길은
길을 막고 버티는 바위를 휘감다가 끝내 바위가 되기도 하는 너의 길은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추위로 익힌 독한 향기를 물고 꽃에게 달려가는 수액은
가지에 닿자마자 소리지르며 하늘로 솟구치며 터지는 꽃들은
온몸에 제 정액을 묻힐 때까지 벌 나비 주둥이를 쥐고 높아주지 않는 꽃들은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한 몸으로 꽃처럼 많이도 임신한 너의 자궁은
불룩한 배를 가지마다 매달아 놓고 무겁게 흔드리는 너의 자궁은
이빨가진 입들을 빌려 자궁을 부숴버려야 밖으로 나오는 너의 씨앗들은
땅에 붙박힌 채 오도 가도 못하고 살아도 죽어있는 것만 같더니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어느 다리보다 먼 길을 지나온 네 몸이 발산하는 침묵은
다리 달린 벌레며 짐승들이 매일 들으며 자라는 너의 침묵은
잎에서 잎으로 길로 허공으로 퍼져나가 산처럼 거대해지는 너의 침묵은
< 눈길에 미끄러지다 / 김기택>
갑자기
말을 듣지 않는 몸무게가 이상하였다
기둥처럼 땅에 박힐 것 같은 튼튼한 다리 하나를
반질반질한 눈길이 살짝 놓아 주었을 때
느닷없이 땅을 잃어버린 몸무게는
공중에 뜬 느낌이 이상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때마침 땅을 디딜 차례가 된 다리 하나가
얼른 몸무게를 받쳐주려 하였으나
눈길은 더 힘차고 경쾌하게
그 다리 마져 오랜 의무에서 해방 시켜주었다.
좌우에 두 팔이 있었으나
그것은 깃털 없는 두 개의 막대기일 뿐이었다.
몸무게는 허공에 낮게 떠서
무거워질 만큼 무거워졌다가
씩씩한 발걸음처럼 힘차게 바닥에 내리꽃혔다.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두 발과 두 다리는 하릴없이 몸무게에 붙어
허공을 향해 허우적거렸다.
성급한 마음이 얼른 일으켜 세우려 하였으나
한번 땅맛을 본 몸무게는
길바닥에 편히 누워 좀처럼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 가로수 / 김기택 >
지나가는 차들과 행인들에게 거치적거리지 않으려고 최대한 가지를 쳐낸 가로수들이 전봇대처럼 전선을 따라 도로변에 줄지어 서 있습니다. 가로수들이 껴입은 더러운 껍질은 긁혀 있거나 벗겨져 있거나 스티커가 붙어 있거나 현수막을 지탱하는 끈에 붙들려 있습니다. 남루하고 칙칙한 이파리들이 박쥐처럼 가지에 떼지어 달라 붙어 있습니다.
무성한 잎으로 여러 상점들 간판을 가리던 나무 하나는 분노한 톱에 베어져 그루터기만 남아 있습니다. 한때 생명을 담았던 그 그릇에는 파문을 일으키며 퍼져가는 나이테가 있습니다. 그 나이테의 무늬 속에는 생명이 바삐 드나들던 맑은 소리와 함께 혹한의 시간과 두꺼운 매연과 소음이 레코드판처럼 녹음되어 있습니다. 목 없는 통닭의 다리처럼 움직이지 않는 뿌리는 여전히 힘차게 땅을 움켜쥐고 있습니다.
녹슨 상수관과 부글부글 끓는 하수도, 전화선과 가스관이 어지럽게 매설된 땅 속에 매설된 땅 속에 가로수들은 시추공처럼 박혀 있습니다. 그래도 봄이 오면 어김없이 매장량이 무한대인 초록빛을 뽑아올립니다. 고엽제 같은 매연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저돌적인 생명, 그 고집불통의 습관을 막을 힘은 이 가로수들에게는 없습니다. 모두가 지루하고 긴 삶을 각오한 지 오래입니다.
< 복잡한 거리의 소음 속에서 / 김기택>
복잡한 거리의 소음속에서
아빠를 부르는 아이 목소리가 들린 듯하였다.
그 소리가 귀에 거슬릴 만큼 커져서
그 소리에 꼼지락거리는 발음이 달릴만큼 커져서
바로 내 뒤까지 왔다는 느낌이 들어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달려오던 소리는
날 이상하게 쳐다보는 작은 여자아이가 되어
놀라 멈칫거리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휙 둘아서 다시 아빠를 부르는 소리가 되어 멀어져갔다.
아이가 보고 놀란 나는 무엇인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아이의 아빠였다가
아이의 눈과 마주친 순간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린
나는 무엇인가.
아빠들어 가득한 이상한 거리.
얼른 업히고 싶은 다정하고 넓은 등을 가지고 있다가
되돌아서는 순간
모두가 똑같은 얼굴이 되는 사람들,
방금 아이가 발견한, 나도 처음 보는,
나는 무엇인가.
무수한 소리들이 하나의 소리가 되는 소음속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소음 속에서
아빠를 부르는 아이의 소리가 몇 번 들린 듯하였다.
그러나 핀셋같은 소음에 의해
아이들 목소리는 손발이 생기자 마자 지워졌다.
나는 그 소음으로 귀를 막고 앞으로만 걸어갔다.
< 두툼하고 따뜻한 먼지 / 김기택 >
주방 전구를 갈다가
이사 온 후 4년이 넘도록 한 번도 들여다 본 적 없는
대우탱크냉장고 위를 우연히 보았네.
카펫처럼 두툼한 먼지가 깔려 있었네.
마루와 가구만 열심히 닦는 동안
먼지는 시간과 공기와 어울리며
눈길이 닳을 수 없는 곳에서 은밀하게
저 두꺼운 것을 잘도 짜고 있었던 것이네.
냉장고가 덩치는 우람하기는 하나
그 뱃속은 사시사철 차가우니
부드럽고 따뜻한 털이 필요하기는 했을 것이네.
태어난 후 40여 년이 넘도록 한 번도 들여다 본 적이 없으니
내 허파 속에도
저 두툼하고 따뜻한 먼지들이 쌓여 있겠네.
거죽은 열심히 씻어도
허파 속 어둡고 축축한 곳은 평생 씻는 일이 없으니
먼지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잘 지냈겠는가.
굵고 기름진 털이 되도록 무럭무럭 자라
가슴판까지 무성하게 뚫고 나오겠네.
< 외로움이 미끼 / 김명인 >
바다가 너무 넓어서
한 칸 낚싯대로 건져올릴 물고기
아예 없으리라 생각했다
줄을 드리우자 이내 전해져온 이 어신(魚信)은
저도 외톨인 한 바다 나그네가
물 밖 외로움 먼저 알아차리고
덥석 미끼부터 물어준 탓일까
낚싯대 쳐드는 순간
한참이나 찌를 통해 주고 받았던 수담(手談)
'툭' 끊어져버리고
걸려온 것은 한 가닥 수평선이다
외로움도 지나치면 해 종일 바닷가에서서
수평선에 이마 닿도록
나도 한마리 마음 물고기 따라나서지만
드넓은 바다 들끓는 파도로도
더는 제 속내 펼쳐 보이지 말라고
헝클림 없이 자옥하게 저물고 있는, 저무는 바다
그 어둠 속속들이 헤매고 온 물고기 한 마리
덥석, 한입에 나를 물어줄 때까지
나, 아직도 바닷가에 낚시 드리우고 서 있다
어느새 바다만큼 아뜩하게 자라
내 앞에서 맴도는
태어나지 않는 저 물고기,
마침내 나를 물어 바다 한가운데
풀어 놓아줄때 까지
걸려온 것은 한 가닥 잘린 수평선이다
외로움도 지나치면 해 종이 바닷가에 서서
수평선
< 말씀 / 김혜순>
우리를 창조하시고 하루 쉬셨다는 그 주일 지금도 기억사시나요
무슨 말씀은 꽃이 되고 무슨 말씀은 이 입술이 되던가요
이 입술을 벌려 하는 말 다 앙ㄹ아들으시나요
이 이름, 이 비유, 이 시니피에 다 알아들으시나요
손가락 꼽아가며 스무고개 넘나드신 그 일주일간
무슨 말씀 치밀어서 이 귀찮은 파리떼 만들었나요
그 몸, 그 팔다리, 그 입술 빚을 땐 무슨 말씀 하셨나요
나처럼 보기에 좋았떠라 하셨나요
이 몸은 누구의 죽음을 쪼개어 껴낸 씨앗인가요
아니면 누구의 삶을 쪼개어 꺼낸 죽음인가요
당신의 말씀, 그 말씀의 세상 뒤로 나가면
아니 그 교란의 거울 뒤로 나갈 수 있다면
뭔가 있긴 있는 건가요
당신과 나의 스무고개 이제 지겹지도 않나요
절대로 한 가진 안 가르쳐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을
살마들은 아버지라 부르나요
그럼 어디 한번 나도 말하지 않아볼까요
우리가 방문을 닫고 무슨 말을 했느지
어떤 말은 몸에서 나온 실타래처럼
우리 몸을 친친 감아버리고
어떤 말은 북극과 남극처럼 멀리 멀리 헤어져
눈물마져 얼어붙도록 시렸는지
어떤 말은 눈발의 흰 토끼처럼 서로에게 보일 수 없었는지
절대로 절대로 당신에게 말하지 않아볼까요
그렇게 입 다물고 있으면 우리도 당신처럼 아버지 되나요
그러니 나한테 박쥐가 내 잠 들여다보고 하는 것 같은
그런 시시한 말씀, 하실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마세요
< 문익점 / 김혜순 >
그리운 패션, 입고 싶다
우리 엄마 꽃무늬 저고리에 검은 통치마
검은 출석부 가슴에 품고 아이들 가르치려 가면
내 새벽잠 속에서 피어나던 흰 포플린 위에 분홍꽃 촘촘
병든 내 온몸에 스멀거리며 피어나던 꽃송이들
한줄기 바람이 꽃소오이 송이마다 묶여서 기침하고
달밤에도 잠들지 않는 개미떼 뻣속 가지마다 스멀거려
그 가려운 꽃으로 실을 잣아 네 벗은 몸 덮어줄께
매화인지 목화인지 밤에 젖은 꽃들이 촘촘히 휘날리는 윈피스 한 벌
입고 싶다. 나는 생 폴의 일요일, 문 닫힌 쇼윈도 앞에 붙박혀 서있네
그 무늬를 들여다 보고 있으려니 내 가슴속 어느 갈피에서
그리운 풍경이 내 몸을 씻어줄 것만 같아
문익점은 생각했을까
저 꽃 피는 밤 풍경을 붓뚜껑에 숨겨가서는
그 붓으로 밤새도록 써내려가면 옷 한 벌 지을 수 있을 거라고
꽃송이로 가득 채운 이불 덮어 그 사람 따듯이 재울 수 있을 거라고
그럴거라고 생각했을까
낯선 거리를 지나다 말고 나는 꽃무늬 원피스 한 벌
입고 싶다. 저 꽃씨들 붓뚜껑에 담아가고 싶다. 하염없이 바라보네
저 원피스 입으면 혼령결혼식을 올린 영혼처럼
내 원피스 속에서 너와 함게 내가
저 머나먼 밖을 내다 볼 수 있을 것만 같아
매화인지 목화인지 밤에 젖은 저 꽃들에 홀려 서 있네
< 판화에 갇힌 에우리디케 / 김혜순 >
눈물이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아세요?
그 눈물이 안으로 들어와 나를 얼려요
눈 내리는 밤 얼어붙은 사람처럼
내 몸에 꼭 맞는 감옥이 있나봐요
잠에서 깨어나 감옥의 목구명 밖으로
소리를 지르지만 입술이 얼어붙어요
비명이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아요
소리마다 생각이 들러붙어 떨어져 나가질 않아요
나 팔, 내 팔, 내 파아...... 내 파아알
파아아아아알을 치워줘요
혀는 구들장 밑에 숨어버렸나봐요
눈물이 처마 밖으로 얼어붙어요
누가 커튼을 걷고 나갔나요?
커튼 밖에는 아침마다 날 들여다 보는
창문보다 큰 눈동자 하나
< 실려가는 나무 / 나희덕 >
풀어헤친 머리가 땅에 닿을락 말락한다
또 다른 생(生)에 이식되기 위해
실려가는 나무, 트럭이 흔들릴 때마다
입술을 달싹여 무슨 말을 하는 것 같다
언어의 도끼가 조금은 들어간 얼굴이다
오래 서 있었떤 몸에서는
자꾸만 신음소리 같은게 흘러나오고
기억의 부스러기들이 땅에 떨어지기도 한다
그걸 받아적으며 따라가다가
출근길을 놓치고 낯선길가에 부려진 나는
나무를 심는 인부의 뒷모습을 보았을 뿐,
나도 모르게 그 나무를 따라간 것은
덜컹덜컹 어디론가 실려가면서
언어의 도끼에 다쳐본 일이 있기 때문일까
어떤 둔탁한 날이 스쳐간 자국,
입술을 달싹이던 그 말들을 다시 읽을 수 없다
< 연두에 울다 / 나희덕 >
떨리는 손으로 풀죽은 김밥을
입 속에 쑤셔넣고 있는 동안에도
기차느 ㄴ여름 들판을 네 눈에 밀어넣었다.
연둣빛 벼들이 눈동자를 찔렸다.
들판은 왜 저리도 푸른가.
아니다. 푸르다는 말은 적당치 않다.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연두는 내게 좀 다른 종족으로 여겨진다.
거기엔 아직 고개 숙이지 않은
출렁거림. 또는 수런거림 같은게 남아 있다.
저 순연한 벼포기들.
그런데 내 안은 왜 이리도 어두운가.
나를 빛 바래게 하려고 쏟아지는 저 햇빛도
결국 어두워지면 빛 발랠 거라고 중얼거리며
깁밥을 네 개째 삼키는 순간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것이 마치
감정이 몸에 돌기 위한 최소 조건이라도 되는 덧.
눈에 즙처럼 피는 연두.
그래. 저 빛에 나도 두고 온 게 있지.
기차는 여름 들판 사이로 오후를 달린다.
< 어떤 출토(出土) / 나희덕 >
고추밭을 걷어내다가
그늘에서 늙은 호박 하나를 발견했다
뜻밖의 수확을 들어올리려는데
흙 속에 처박힌 다디단 그녀의 젖을
온갖 벌레들이 오글오글 빨고 있는게 아닌가
어찌보면 소신 공양을 위해
타다타닥 타고 있는 불꽃들 같기도 했다
그 은밀한 의식을 훔쳐보다가
나는 말라가는 고춧대를 덮어주고 돌아왔다
가을갈이를 하려고 밭에 다시 가보니
호박은 온데간데없었다
불꽃들고 흙 속에 잦아든지 오래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녀는 어느새 젖을 다 비우고
잘 마른 종잇장처럼 땅에 엎드려 있는게 아닌가
스스로의 죽음을 덮고 있는
관 뚜껑을 나는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한 웅큼 남아 있는 둥근 사리들 !
< 흔적 / 박형준 >
입을 벌리고 그는 잠을 잔다
난쟁이들이 들락거리는 꿈이라도 꾸는가
썩어버린 이가 동굴 천장에 매달린 석순(石荀)이다
꽃 한송이를 밀어넣으면
금세 흉곽까지 내려가리라
그의 잠은 배고픈 블랙홀이다
그러다가 간혹 휘파람 소리를 내보낸다
사방이 빌딩으로 막힌 작은 공원,
한껏 벌어진 그의 입 속에 겨울빛이 동면을 서두른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빛이, 석순에 부딪히며
아래로 아래로 꺼져간다
간밤에 큰 눈이 내렸다
그의 한껏 벌어진 입 속에도
따뜻한 잎들이 두껍게 깔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눈밭 속에서 내가 도착했을 때
아침 햇살을 받으며 그가 누워있던 곳은
자리만 찍혀있고,
길게 발자국이 흔적에서 뻗어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 구관조 (九官鳥) / 박형준>
안.녕.하.세.요.여.기.서.는.속.도.가.느.껴.지.지.않.는.답.니.다.
홍은동 295번지와 연희동의 교차로 한 귀통이의 연희지하차도 위는 풀밭으로 되어 있다. 풀밭 다리를 건너면 아파트가 보이고, 다리 아래 굴로 차들이 빠르게 빠져나가지만, 여기서는 시간이 방아꺠비 발처럼 끄덕뜨덕 제자리를 맴돌 뿐 흘러가지 않는다
먼저 밤이면 뿌리가 달빛에 젖는가
풀밭 다리에 서서
나는 희끄무레하게 빛나는 구관조를 쳐다본다
구관조는 죽어서야 비로소 새장 밖으로 나온 모양이다
버려진 속은 달빛을 받아 흰 날개들이 무수히 태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내장을 둥글게 파먹고 있는 구더기떼가
구관조에게는 빛이다
끼억끼억 차들이 아스팔트에 기스를 내며
때로는 종주먹을 날리며 운전사들이 멱살을 붙잡고 싸우는 동안에도
구관조는 다리 위에서 꾸물꾸물 구더기를 낳고 있다
천천히 알을 까며 밤의 기슭으로 흩날린다
화관처럼 생긴 머리위에 누가
시계곷을 엮어 장식해놓았다
소녀 하나가 아파트에서 나와
풀밭 다리를 건너오는데
바랜 구관조의 깃털이 머리핀처럼
불어온 바람에 흔들린다
죽어서야 날개를 낳는 구관조가
그 순간 명랑하게 내게 인사를 건넷는지
다리 아래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
< 나는 상표 뜯겨진 불량 식품이다 / 이성복>
배고픔이란게 있다. 꺼지지 않는 배고픔, 뭘 못 먹어서가 아니다. 우리 아이 초등학교 대 할아버지 선생님, 62평 아파트 사는 승엽이 엄마 학교오면 , '이상하다, 난 왜 승엽이 엄마 얼굴만 보면 배가 고프지?'하고 껄껄 웃었다는데, 정년 퇴임 얼마전 테리스 치다 세상 떠난 그이 배고픔은 테니스가 꺼준것이다.
그러나 아침해처럼 씩씩한 배고픔도 있다. 다시 말해 굶주린 흔적이 없는 것이다. 보습학원 김 원장은 동네 테니스에서 수준급인데, 고수 가운데 고수 유사장만 나타나면 입이 벌어진다. '유사장님만 보면 이렇게 좋네요, 매일 좀 나오세요.' 하수 가운데 하수 나를 보면 똥 씹은 표정을 하는 그에게, 나는 상표 뜯겨진 불량식품이다.
출근시간에 쫒긴 사내들 하나둘 자리 뜨고 나면, 왠지 나는 심드렁해진다. 환갑 진갑 다 지난 할매들한테 판판이 깨지면서도, 구력 십년의 명예가 못 미뜩한 것이다. 구토감 일으키는 불량식품에게도 배고픔은 있다. 공복(空腹)처럼 썰렁한 아침 테니스장에 , 노란 공 쫒아다니는 백발의 할매들, 미국지리공처럼 낯설다.
<안식년 2 / 이성복>
허나 사랑이란 피곤해지면 잠자야 하는 것
또 굶주리면 먹어야 하는 것
- 에밀리 디킨슨,
[사랑이란 죽은 이도 거의 소생시킬수 있는 것]
내가 담장 너머로 '복분식 아줌마, 잔치국수 하나 해주세요' 그러면 '삼십문 있다가 와요' 하기도 하고 '오늘 바빠서 안 돼요'하기도 하고, 그러면 나는 할매집 도시락을 시켜 먹거나, 횡단보도를 두번 건너 불교회관 옆 밀밭식당에 아구탕 먹으러 간다. 내 식욕과 복분식 아줌마의 일손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재빨리 내 식욕을 바꾸는 것이다. 아니 식욕을 바꾼다기보다는, 벌써 다른 식욕이 찾아오는 것이다. 내가 알았던 여자들도 대개는 그렇게 왔다. 하루 이틀 지나면 그때는 무얼 먹고 싶었는지 생각도 안 나는 세월에서.
< 시론(詩論) / 정진규 >
제일 두려워했던 것은 내 시속에 낵 나이가 맨몸으로 들앉아 있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는데, 들키는 건 제일 나중에 하자고 작심해온 것이었는데, 늙지 않았다는 말을 다행으로 여겨왔는데 이젠 아니다 정면(正面)이다 그간 나는 은유에 속았다 은유가 거추장 스럽다 잘 자란 소나무는 편린(片麟)이 얇다 홍안백발이라는 말이있지 그 말 그대로 너의 문전을 서성이겠다 박대하지 말라 제대로 늙자 물푸레 나무를 오얏나무라고 우기지말자 다리를 놓고 강을 건너다니지 말자 제안에 있는 다리들을 다리가 없이 건너다니는 일이 그게 더 황홀하다 그게 제대로 늙는 길이다 물푸레나무를 물푸레나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까지 잘못 놓인 다리들을 거두어내자 빠를수록 좋다 강 건너 있는 것들이 당초부터 물푸레 나무안에 죄다 들어와 있던 걸 처음 보왔던 날 황홀이여, 네가 왔다 나는 늙었다고 당당하게 말해다오 걸어다닐 줄 모르는 나무들도 죄다 알고 있다 모든 것들엔 다 눈들이 달려있다 아침 이면 눈 뜨고 밤이면 눈을 감는다 더러는 늦잠을 자지만 더러는 밤을 새우는 상가(喪家)의 불빛도 있지만
< 곱빼기 자장면을 먹으며 / 정진규 >
불란서 사람들이 자연을 큰책이라 깨닫고 글로 쓴 사람의 책을 작은 책이라 했다는 말을 들은 뒤부터 나는 자꾸 작아졌다 그 말 들은 지가 십 년은 족히 넘었으니 나는 쥐눈이콩만큼 줄어들어 반쩍거리고 있을까 아주 지워졌을까 쓸수록 작아지는 책 너를 드나든지는 훨씬 그 이전, 사십 년이 넘었으니 그게 확실할 게야 뿐이랴 나의 사랑아, 너는 아무래도 큰 책 너를 드나드는 나는 작은 책, 그러니까 곱빼기로 나는 지워져가고 있다 너를 보내고 나서 배가 고파 곱빼기 자장면을 먹으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곱빼기 자장면을 먹었으니 곱빼기에 곱빼기로 나는 지워져가고 있따는 생각을 했다
< 지루한 날 / 천양희>
지루한 날이면
물끄러미 가로수를 바라본다
구름이 느릿느릿
나무 위로 지나가고
햇빛이 느리느릿
나무 밑을 지나간다
가로수는 어쩌면
누워있던 땅이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어느 날 벌떡, 일어선 게 아닐까
저렇게 평생 서 있다니
지루한 날이면
물끄러미 땅을 내려다 본다
달팽이가 느릿느릿
풀밭을 지나가고
발자국이 느릿느릿
땅을 밟고 지나간다
땅은 어쩌면
서 있던 나무들이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어느날 털썩 주저앉은 게 아닐까
저렇게 평생 주저앉아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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