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

강경호 - 늙은 색소폰 연주자   ,  강영은 - 트롬세탁기에 관한 보고서

강회진 - 명혹헌   강희안 - 소금의 유혹 ,   고영민 - 꽃마중

고형렬 - 푸른 얼음의 물고기 ,   공광규 - 은행남   , 구석본 - 식사

김기택 - 커다란 나무 ,   김남조 - 숭례문 ,   김명리 - 먼 입술

김백겸 - 제련소 ,   김사이 - 오래전 그날 ,   김상미 - 위대한 양파

김석환 - 관어대(觀魚臺)에 올라  ,   김소연 - 고독에 대한 해석

김승희 - 모차르트의 엉덩이 2 ,   김영찬_ L의 외출

김완화 - 물소리 ,    김정인 - 자루의 속성 ,  김종미 - 질투

김종철 - 민어회를 씹으며 ,   김지순 - 물렁물렁 계단

김해자 - 어진내에 두고 온 나   김후영 - 비극을 수선하다

나태주 - 신기루 ,    노향림 - 춘방다방 ,   류인서- 위조화폐

맹문재 - 벚꽃에 들어앉다 ,  문정희- 어머니의 시

박남희 - 지퍼를 이해하는 법 ,  박미산 - 대머리 박홍조씨와 화투치기

박선희 - 아름다운 비명 ,  박완호 - 백곡간다

박정원 - 별똥별 ,    박제천 - 고주랑 망태랑 ,   박종국- 섹스의 색

박현수 - 슴베라는 말을 배우다,   박형준 - 무덤사이에서

박홍점  - 모가리 ,   방민호 - 스윙,   백무산 - 내가 계절이다.

서안나 - 불타는 문장,  손순미 - 냉장고, 냉장고야 ,   손한옥 - 오해

손현숙 - 맞서다,  손현철 - 석류(石榴),   송경동 - 시인이라는 것

신달자 - 내앞에 비 내리고 ,  신현정 - 콧수염 ,  심인숙 - 진수성찬

양문규 - 곡우 ,   오세영 - 울음,  오장국 - 진흙들 , 오탁번 - 운수 좋은 날

위상진 - 쉼표 박물관 ,   유안진 - 농담, 최소한 셋이라면?!

유정이 -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   유홍준 - 중국집 오토바이의 행동반경에 관하여

윤석산 - 진설(陳設) ,   윤정구 - 은난초(隱蘭草),   윤제림 - 꽃을 심었다

윤향기 - TO. 잔느 에뷔테른 ,   이가림 - 촛불소묘 , 

이덕규 - 싹트기 전날 밤의 완두콩 심장소리 ,   이명수 - 두고 온 왕촌

이선영 -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없다.   이성부 - 시멘트 길

이순주 - 13월의 개나리 꽃 ,   이승하- 항하에 와서 울다

이승희 - 시절, 불빛           이시영 - 한 동네 사는 여자

이영식 - 침묵의 재구성 ,    이영혜 - 네모난 여자

이운룡 - 말에 대한 백지의 생각 ,       이윤학 - 퇴촌

이은규 - 물위에 찍힌 새의 발자국은 누가 지울까

이은봉 - 물고기    이정록 - 기도 ,    이정섭 - 해부학 교실

이정주 - 나무 .   이종암 - 무논의 책 ,   이주희 - 동백꽃

이혜선 - 새소리 택배,    임곤택 - 플라타너스 ,  임승빈 - 촛불

임윤 - 새떼에 휩쓸리다.   장경린 - 블랙 먼데이 ,   장철문 - 고막이 터지는 때

장현숙 - 선장,    전건호 - 변압기 ,   전숙 - 주름,  전윤호 - 법흥사 발전소

정끝별 - 세 권의 미래 ,   정우영 - 눈눈눈   , 정유화 - 맨손의 노래

정준영 - 백설기와 라일락,   정진규 - 삶은 감자 세알 , 조기조- 유산

조오헌 - 여행,    조은길 - 고래 ,    조정권 - 벚꽃하품

주종환 - 2009.10.8일 날씨 흐림,  차승호 - 코 빠뜨리는 이야기

차주일 - 돈키호테의 배수진,    최금녀 - 무생물도 봄을 기다린다.

최금진 - 집에 못들어가는 사람,   최동호 - 반구대 향유고래 사랑 노래

최두석 - 느 놋숟가락 ,   최문자 - 저체온증 ,   최진화 -  밀랍인형들이 사는 거리

표성배 - 1000일,    하종오 - 저지레의 가족사 ,    한영옥 - 유람(遊覽)

한우진 - 완결 ,    허의행 - 첫사랑,   허홍구 - 이준희 ,  홍일표 - 겨울의 식성

 

	< 오래전 그날 / 김사이>   주전자에 한가득 물을 끓여 커다란 플라스틱 대야에 담가 놓았다 대야의 물이 빨리 뜨거워지기를 기다리며 갈급증에 손을 넣었다 뺐다 방정을 떨다 은빛 몸뚱이에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종점다방 마담이 내뱉는 담배연기처럼 교태를 부리듯 아찔해지는네   문득 오래전 그날 최루가스가 분가루처럼 뿌옇게 덮은 거리에서 유난히 번쩍이는 하이바 도망가다 넘어진 내게 차마 방망이를 휘두르지 못하던 백골단의 하이바가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끊임없이 모서리를 내리치는 두려움에 등글어지지 않는 첫 경험을 어쩌리   뜨거운 것과 찬 것이 만나서 서로에게 스며드는 것은 사랑일까 데일 것 같은 뜨거움보다 표정없는 차가움보다 뜨뜻미지근한 온도가 더 위험스러워 몸뚱이 안팎으로 등을 맞댄 가장 뜨거웠을 때와 가장 차가웠을 때의 온도가 같아지는 순간 삶은 미끌, 미끌, 또 미끌 저도 모르게 격렬한 몸살을 앓으면서 가는 것을     < 물소리 / 김완하>   이 세상 빛나는 것들은 모두 어둠의 철벽 속을 뚫고 가는 몸부림 어둠을 삼키고 나온 상처가 있다   어둠 속 시궁창에도 물줄기 맑고 고운 소리로 깨어났다 어둠이 세상만물의 얼굴 지우자 그 어둠 속에 투신하여   자신의 바닥을 치고 살아나 하늘의 별빛에 닿으며 지성으로, 지성으로 배를 깔고 간다   빛을 지우면 소리로 살아나고 소리를 비우면 고요로 솟아나고     < 자루의 속성 / 김정인 >   매달린 샌드백의 꽉 다문 입을 본다 꺾인 손목에 얹힌 뜨거운 소금자루를 본다 어느 순간, 입이 없어진 아버지의 얼굴을 본다 묶인 자루는 터지는 옆구리가 겁난다 봉인해버린 기억이 두렵기 때문일까 재수술통지서를 받고서 등지고 앉아 신문만 뒤적이던 아버지 그저 주저앉기만을 바란다 자루는 조금씩 자루를 파먹으면서 점점 작아지고 싶은 것이다 묶인 자루는 머리를 흔들어 지울 허공이 없다 아버지가 내어준 어깨에 내가 발 디디듯 서로의 어깨를 밟고 올라가 서걱거리다가 어느 날, 모가지 비튼 닭 모래 주머니 뒤집어 치대듯 그렇게 떠나고 싶은 것도 있는 것이다     < 위조화폐  / 류인서>   지루한 휴전의 나날, 즐겨 입는 체크무늬 셔츠의 창살 안에서 나는 오늘 적들의 화폐 만들기에 열중입니다   내가 만든 이것으로 나는 다섯 개 강을 건너 사흘 동안 걸어가면 나온다는 적의 옛 마을이 숨은 지도를 살지도 모릅니다 벚나무 가지에 걸어둔 춤추는 노숙자소녀의 분홍전화기를 살지도 모르고 두툼한 샌드위치와 커피가 있는 휴일의 식욕과 다시 바꿀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오늘 사랑법 위조만을 위로 삼는 위험한 선택입니다   쇠비린내가 묻어나는 천진한  내 손은 나의 전리품입니다 식민지인 이 손안에서 팔락이며 짤랑이며 몸을 섞는 악화와 양화들 보실래요? 곧 패총처럼 수북해지겠군요   동천처럼 뻣뻣하고 지전처럼 후줄근한   **********< 시해설 >****** 산다는 것은 "체크무늬 셔츠" 속의 주체가 법의 지배를 받는 현실의 타자와 끊임없이 전쟁을 하다가 멈추는 "지루한 휴전의 나날 "을 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체는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꿈을 꾸지만 냉엄한 법질서로 얽힌 현실은 그것을 다 용납하지 않고 억압한다. 따라서 주체는 욕망이나 가치와 다른 마스크를 쓰고 타자의 영역인 현실로 진입할 수 밖에 없다. 즉 현실이라는 적들 속에서 유통될 수 있는 " 적들의 화폐 만들기에 열중" 해야 한다. 그것은 진정한 주체의 욕망 또는 가치를 대신 할 수 없는 "위조화폐"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을 만드는 손은 적들의 법과 권력을 따라야 하므로 "전리품"이며 "식민지"이다.     < 어머니의 시   / 문정희>   어머니의 위대함은 가엾음에 있다 이 시의 첫 줄을 써놓고  한 시절을 보내고 이제 이렇게 풀어 나간다   어머니는 나처럼 시를 쓰지 못해 천둥과 번개를 침묵으로 만들어 목구멍 깊숙이 밀어 넣고 살았다 그리고 고층 아파트에서 혼자 죽었다   이삿짐을 내리는 선반 사다리 대신 한 남자가 짐승처럼 등을 구부리고 검은 관을 지고 내려왔다 술 냄새 짙게 풍기며 고꾸라질 듯 층계를  내려오는 어머니의 죽음보다 더 슬픈 등   그 무량겁의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나는 생애의 울음을 멈추어버렸다   비로소 신의 손을 잡을 일밖에 남아 있지 않는 마지막 낮은 사람의 등을 보았다 어머니는 나처럼 시를 쓰지 못해 시 대신 보여준 끝 장면은 이것이었다       < 아름다운 비명  / 박선희>   바닷가에 앉아서 파도소리에만 귀 기울여 본 사람은 안다 한 번도 같은 소리 아니라는 거 그저 몸 뒤척이는 소리 아니라는 거 바다의 절체절명. 그 처절한 비명이 파도소리라는 거   깊은 물은 소리 내지 않는다고 야멸차게 말하는 사람아 생의 바깥으로 어이없이 떠밀려 나가 본 적 있는가 생의 막다른 벽에 사정없이 곤두박질쳐 본 적 있는가   소리 지르지 못하는 깊은 물이 어쩌면 더 처절한 비명인지도 몰라 깊은 어둠 속 온갖 불화의 잡풀에 마음 묶이고 발목 잡혀서 파도 칠 수 없었다고 큰 소리 내지 못했다고 차라리 변명하라   바다가 아름다운 것은 저 파도소리 때문인 것을   너를 사랑하는 이유도 그러하다       < 별똥별   / 박정원>   눈물이 마르면 별이 되지 별이 사라지면 이내 또 눈물이 되곤 하지 이렇게 말하는 노老시인의 눈빛이 촉촉하다 멀리서 찾으려 하지 말고 가까이에서 찾아봐 그것을 발견하는 눈빛을 언제나 반짝이도록 갈아놓는것 잊지 말구 우리들 안엔 많은 별들이 있지 그걸 위에서 보느냐 아래에서 보느냐 곁에서 보느냐 속에서 보느냐 뒤집어 보느냐 거꾸로 보느냐 짓밟아 보느냐 칼로 베어보느냐 입으로 물어뜯어 보느냐 잘근잘근 씹어보느냐 어떻게 보느냐 생각하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지 별이 눈물이고 눈물이 별이라고 안 했어 '마르면' '사라지면' 이라고 있잖아 '마르면' 대신에 '흘리면' 으로 할 수도 있고 '사라지면' 대신에 '들어오면'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별이고 눈물이고 다 기호로 만든 약속에 불과해 처음 말을 틔우는 아가처럼 별이 꼭 별이 아닌 다른 별로 그려봐 검은 산등성이 중간쯤 별 하나 빗금을 그으며 사라지는 모습이 노시인의 어깨너머로 설핏보인다     < 울음   / 오세영>   산다는 것은 스스로 울 줄을 안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울릴 수 있다는 것이다. 갓 태어나 탯줄을 목에 감고 우는 아기. 빈 나무 끝에 홀로 앉아 먼 하늘을 향해 우짖는 새.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같이 모두 울고 또 울린다. 삶의 순간은 항상 만나고 헤어짐의 연속임으로...... 바람이 우는 것이냐, 전깃줄이 우는 것이냐. 오늘도 나는 빈 들녘에 홀로 서서 겨울바람에 울고 있는 전신주를 보았다. 그들은 절실한 것이다. 물건도 자신의 운명이 줄에 걸릴 때는 울 줄을 아는 것이다.     <  무덤 사이에서  / 박형준 >   내가 들판의 꽃을 찾으러 나갔을 때는 첫서리가 내렸고, 아직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였다. 추수 끝난 들녘의 목울음이 하늘에서 먼 기러기의 항해로 이어지고 있었고 서리에 얼어붙은 이식들 그늘 밑에서 별 가득한 하늘 풍경보다 더 반짝이는 경이가 상처에 찔리며 부드러운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내가 날려 보낸 생의 화살들을 줍곤 했었다. 내가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 영혼의 풍경들은 심연조차도 푸르게 살아서 우물의 지하수에 떠 있는 별빛 같았다. 청춘의 불빛들로 이루어진 은하수를 건지러 자주 우물 밑바닥으로 내려가곤 하였다. 겨울이 되면 , 얼어붙은 우물의 얼음 속으로 내려갈수록 피는 뜨거워졌다. 땅 속 깊은 어둠 속에서 뿌리들이 잠에서 깨어나듯이, 얼음 속의 피는 신성함의 꽃다발을 엮을 정신의 꽃씨들로 실핏줄과 같이 흘렸다. 지금 나는 그 징표를 찾기 위해 벌거벗은 들판을 걷고 있다. 논과 밭 사이에 있는 우리나라 무덤들은 매혹적이다 죽음을 격리시키지 않고 삶을 껴안고 있기에, 둥글고 따스하게 노동에 지친 사람들의 영혼을 껴안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나라 봉분들은 밥그릇을 닮았다. 조상들은 죽어서 산사람들을 먹여 살릴 밥을 한상 차려놓은 것인가. 내가 찾아 헤매다니는 꽃과 같이 무덤이 있는 들녘, 산 자와 죽은 자가 연결되어 있는 밥공기와 같은 삶의 정신, 푸르고 푸른 무덤이 저 들판에 나 있다. 찬 서리가 내릴수록  그속에서 잎사귀들이 더 푸르듯이 , 내가 아직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 나를 감싸던 신성함이 밭 가운데 숨쉬고 있다. 어린아이들 부산을 떨며 물가와 같은 기슭에서 놀고 농부들이 밭에서 일하다가 새참을 먹으며 죽은 조상들과 후손의 이야기를 나누던 저 무덤, 그들과 같이 노래하고 탄식하던 그 자취를 따라 내 생이 제 스스로를 삼키는 이 심연 속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간다. 겨울이 되면, 저 밭가의 무덤 사이에 누워 봉분들 사이로 얼마나 밝은 잠이 흘러가는지 아늑한 그 추위들을 엮어 정신의 꽃다발을 무한한 죽음에 바치리라. 나는 심연들을 환하게 밝히는 한순간의 정적 속에서 수많은 영혼들로 이루어진 은하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아직 어린 아이였을 때 내려다 보던 지하수의 푸른빛을, 추위속에서 딴딴해진 그 꽃을 캐서 나는 집으로 돌아가리라.     < 물 위에 찍힌 새의 발자국은 누가 지울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의 눈물은 질문이다   저수지에 먼저 도착에 있는 적막 닫아 놓았던 귀를 열어 풍경의 모퉁이를 서성이는 허공을 듣는다   어떤 종족이 허공에 발자국을 찍을 수 있을까   새 한마리 총총, 물 위를 난다 수면에 발자국으로 무슨 흔적을 남기는 것도 같은데 마침표를 찍어 완성하기 전 바람이 잔물결을 일으켜 발자국 문장을 지운다   문장 따위야 사람의 소관이라는 듯 새는 몇 점點눈물로 저수지의 수위水位를 알맞게 조절 할 뿐 금세 풍경의 모퉁이를 돌아 나간다   누군가 물수제비로 새겨 넣은 문장을 오래 듣는 귀가 여기 있다 그는 이제 허공에 발자국을 찍을 수 있는 종족   물수제비 문장을 기억하는 바람에게 물 위에 찍힌 새의 발자국은 누가 지울까 하릴없이 묻는 날이 길다 아직 눈물이 아닌 질문 몇 점 후둑, 후두둑   그날의 적막에게 어떤 문장은 마침표 없이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걸 배운다.   여름 하오, 꼭 한 뼘 높아진 저수지의 수위      < 고막이 터지는 때   / 장철문>   사랑이여, 지금은 꽃이 미어져 나오는 때 너와 나의 것이 막무가내로 삐져나오는구나 네 가슴이 소란으로 터지고 내가 겨울 건너온 가지처럼 피폐할 때 내가 믿지 않은 것이 비집고 나와서 잊혀진 지뢰처럼 터지는구나 이 폭발을 위하여 너와 내가 걸레쪽처럼 찌들어서 사냥개와 오소리처럼 물어 뜯었구나 지금 피어나서 사라지는 수수백천만의 불꽃처럼 화염처럼 스러지고 또 피어나는구나 이 소란을 위하여 너와 내가 장다리처럼 말라 보트라지고 뿌리가 짓물렀구나 사랑이여, 지금은 검은 생강나무 가지에서 노란 꽃무리가 눌러 쟁인 울화처럼 열꽃처럼 터지는 때 마른 껍질 밑으로 물을 끌어올린 산버들 가지에서 새 새끼 주둥이 같은 잎사귀들이 삐져나와서 고막이 터지는 때     < 여행  / 조오현 > 어떤 사람이 나를 만나 뵙고 싶다고 부처님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얻고 싶다고 전화를 했다. 나는 참 잘난 놈이라고 속으로 웃고는 큰소리로 " 나는 지금 여행 중이다"  했더니 그 사람이 "언제 돌아오십니까" 하고 묻기에 "그건 나도 물라 어쩜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몰라"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사실 나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길을 평생 나로부터 떠나고 떠나고 있다.      < 고래  / 조은길 >   불덩이 같은 알전등을 들이대고 날마다 하늘바닥을 뒤지는 너는 대체 찾는 것이 무엇인가   지상의 녹음방초는 네가 그곳을 헤매는 동안 흘린 땀과 눈물의 증거   초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산길을 민머리 사내가 가고 있다 희미한 가사장삼이 초록에 휩싸여 푸우푸우 헤엄치는 듯 가고 있다   등에는 주린 짐승의 염통같은 낡은 배낭 하나   산새들이 제 이름을 외치며 초록을 뒤직고 있다   너를 찾는 동안 나는 나를 간신히 피했다       < 벚꽃하품  / 조정권> 이 봄날 눈길 주차할 자리를 못찾고 교정을 몇 바퀴 돌다가 혼자 앉아 있는 벤치 옆에 앉는다. 왕벚꽃 흐드러진 교정그늘 온 사방 몰려든 벚꽃 부셔 두 둔에 염해 버린다. 내 눈엔 하품이. 벤치 밑 과자 종지는 심심해. 새들은 아침의 술집에서 나온 내 얼굴을 보고 왜 입을 다물까 물을 찾아 내려가는 뿌리처럼 이 발목을 심어볼까. 이 머리통에 석부작에 덧대어 끼어볼까. 나무들은 얼마나 눕고 싶었을까 . 해마다 눈을 간질인 저 철쭉은 얼마나 제 모습을 한번 들여다보고 싶었을까. 목련은 꽃 다 진 제 치마폭을 한번쯤 내려다 보았을가. 공중에 매달아 놓은 확성기는 얼마나 쉬고 싶었을까. 교정의 바위는 마음을 만나지 못하고 총장실 심석心石은 제 머릿속만 들여다 보고 , 노교수님이 책을 안고 들어오신다. 읽어주신다. 저 책은 얼마나 심심했을까. 저 책을 땅 속에 심으면 얼마나 하얀 꽃들이 만발할까. 대학 박물관은 왜 늘 공사 중일까 . 공사장 소음들은 얼마나 신날까. 유물들은 얼마나 심심할까. 시간은 정년을 향해 뛰어간다.     <  집에 못들어가는 사람  / 최금진 >   초상집에 가서 젯밥이나 먹고 다녀도 세월은 가겠지 결혼식 하객 틈에 끼어 국수를 말아먹거나 일렬종대로 서서 무료급식소를 기웃거리거나 누가 풀어놓은 저수지의 고기들을 다 건져 먹거나 빈 밭둑에 남아도는 배춧잎을 씹거나 미쳐서 집 나가 다신 안 들어온 친척 아주머니처럼 해피하게 살 수 있겠지 식구들이야 나를 죽이고 싶겠지 자유가 얼마나 더러운 지폐 같은 것인지 가게에서, 월셋방에서 내 이름을 지불할 때마다 혀를 물겠지 작은 돌무기처럼 쭈그리고 앉아 바라보는 남쪽 바다 목발을 짚고 걸어가는 시뻘건 태양이 손을 잡아끌면 나는 또 신기한듯 , 두려운 듯, 수평선을 넘어가겠지 지구는 둥글어서 자꾸 걸어나가면 언젠가는 결국 제자리로 오게 될까 두려워, 나는 어쩌면 뻥 뚫린 무한의 하늘로 날아오를지도 몰라 그러나 다음 생에선 당신들이 나를 밟고 다녔으면 좋겠다. 어떤 사람은 집에 못들어간다 제 속에서 들여오는 소리를 따라 일생 헤매는 사람도 있다   용서해 주지 낳아도 좋다. 인생은 짧고 공허는 깊다.     < 반구대 향유고래 사랑 노래   / 최동호>   거대한 흰고래가 향유를 가득 머리에 이고 산다는 것은 슾은 일이다 바다 밑에서 삼킨 작은 새우들의 기름을 바보처럼 머리통에 담고 있어 물위에서 인간의 작살에 죽는 것이 그들의 생애이다   향유고래가 살아 움직이고 있는 신석기 시대 반구대 암각화 샤만과 함께 춤추던 옛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향유고래를 그려 놓았는지는 모르지만 머리통에 향유를 가득담고 한 눈을 뜨고 잠자는 이 향유 고래의 슬픈 진실을 그들고 알고 있었을 것이다   먼 북방에서 들려오는 가날픈 신호음을 들으려는 것퍼엄 향유고래 긴 이빨로 만든 피리를 불고 고래 고기를 먹으며 축제를 벌이던 옛 사람들도 그들의 생애가 휘파람으로 멀리 있는 연인을 찾는 향유고래처럼   세상을 사랑하고 살아가기 바라는 깊은 염원이 있어 들에 그들의 형상을 새기고 그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거대한 흰 고래처럼 사랑을 가득 머리에 이고 사람으로 오늘을 산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 저체온증  / 최문자 >   그동안 나보다 높은 새의 체온으로 살아왔다 새들이 무더기 무더기 두고 간 분홍빛 체온 그 뜨거움의 힘을 믿고 한겨울 마른나뭇가지 에 온종일 걸려 있어도 식지 않았다 나보다 높은 허공에 새집을 짓고 나보다 높은 남자를 사랑했다 분홍신을 신고 말문이 막혀 불덩어리가 되어 막혔던 혀 후루룩 후루룩 새 날아가자 뚝뚝 떨어지던 체온 가까스로 마른 나뭇가지 하나 붙들고 떨고 있다 떠 있기 위애 서리 속 마지막 남은 사과 한 알을 지나 하늘 높이 날아간 새 날개 밑에 숨어 같이 날아간 체온 아무도 모른다 이 저온의 수심을   ************< 시해설 >------  이 시의 화자는 두 개의 '나 '로 분화되어 있다. 하나의 '나'는 " 나보다 높은 " '나' 곧 "새의 체온으로 살아" 온 '나'이고 다른 하나의 '나'는 평범한 '나' , 곧 이 시의 화자로 존재하는 '나'이다. 이런 구조를 바탕으로 이 시는 후자의 '나'가 전자의 '나'를 성찰하고 반성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정작 초점이 되느니 것은 전자의 '나'이다 한때는 '분홍빛 체온 / 그 뜨거움의 힘을 믿고 / 한겨울 / 마른나뭇가지 에 온종일 걸려 있어도  / 식지 않았" 던 것이 이 '나'이다 . 이으고 이 '나'는 "나보다 높은 허공에 / 새집을 짓고 / 나보다 높은 /남자를 사랑" 한다. 하지만  이 '나'는 지금 " 새 날아가자 / 뚝뚝 떨어지던 체온 "으로 "마른 나뭇가지 하나 붙들고 떨고 있"다. "날아간 새 /날개 밑에 숨어 /같이 날아 간 " 그의 체온을 누가 알겟는가 . 저온의 그가 느끼는 수미을 알 사람은 없다.     < 완결  / 한우진 > 눈썹 끝에 인두 올려놓고 일없다 울 일없다 마음에 풀 먹여 가며 더딘 사랑을 쓰다   소용없다 꽃 ! 짓누르며 삐뚤삐뚤 쓰디쓴 언약만 연필심인양 나무 속으로 들어차다   어느새 연필 공장이 된 숲. 새가 연필 한 자루를 뽑아 물고 하늘에 내 천川자를 천 번이나 긋는다 새의 날개가 닳는다   일없다, 사랑없다! 닳는 것은 강을 받아쓰는 갈댐나이 아니어서 몽당연필 같은 나도 당신의 책받침을 끼고 어깻죽지가 아프다   * 완결 (완缺)  : 나무, 돌, 쇠붙이 따위에 새긴 글자가 닳아서 흐려짐.   < 첫사랑  / 허의행 > 1 첫사랑의 여자가 있었다 짐승처럼 나만을 사랑해 주었다 어엿한 젊고 잘 생긴 남편이 있는 유부녀인 나의 첫사랑 여자는 부끄러움도 없었다   남편이 밤낮으로 사랑해주는데도 서틀고 미숙했떤 내가 해주는 사랑을 남편의 능숙한 살아보다 더 좋아했으면 순수한 사랑이라고 했다   남편과의 사랑은 껍질만 남아 있다고 속삭였다 남편이 죽으면 따라서 죽을 수는 없어도 내가 죽으면 따라서 죽는다고 약속했다   2 첫사랑 여자와 입도 맞추었고 옷을 헤집고 젖도 만지고 밤새도록 안아주어야  잠을 잤다  한때는 첫사랑 여자가 없으면 나도 죽는다고 다짐 했었다   첫사랑 여자보다 젋고 예쁜 여자의 매력을 느낄 줄 알면서부터 나는 첫사랑 여자를 미워했으며 젊고 여쁜 여자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보기도 싫게 늙어만 가는 첫사랑  여자는 병들어 죽어가면서도 나에게 끝까지 집착했었다 그 여자가 첫사라의 여자 나의 어머니! 어머니이시다!     < 겨울의 식성  / 홍일표 >   겨울은 이빨이 없다 연신 물을 들락거리는 사람들, 우연히 방문하는 길가의 가로수나 구름 한점도 소화 시킬수 없다 우물거리다가 다 토해내는 거식증 환자다 뼈만 남은 발목하나 담글수  없는 겨울 하늘, 새들이 일찌감치 발을 뺀 공지다 나, 누구도 담지 못한 꽝꽝 얼어 붙은 겨울을 깬다 고해하듯 와르르 뒤뜰 담장이 무너져 내리고 조각조각 혓바닥 베인 햇살들 오랜 번민의 발자국을 안고 녹아내리는 눈 속을 뒤적이면 무청 같은 새파란 눈썹하나 꿈틀댄다 내 안의 퀭한 거울이 배가 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