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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지은이 : 강은교 묵상록

출판사 : 새벽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 들 좋아하지 않으랴 .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라도 한다면,

아아, 아직 處女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萬里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엔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人跡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목차 >

* 서시 /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 책 머리에

1. 사슬을 끊고 자유를 향해

1) 출생과 죽음, 그리고 기다림

2) 문 앞에서

3) 두 장의 편지

4) 사랑이 있는 곳으로

5)사슬을 끊고 자유를 향해

2. 절망과 고통의 땅 위에

1)인간을 위한 문학

2) 시의 현실과 삶의 현실

3) 어둠 속에 묻힌 다정한 판화

4) 해방을 위하여

5) 의미 없는 땅 4.19 공원

6) 죽음 또는 절망에의 사랑

7) 어느 여름날 밤에

3. 나의 사랑법

1) 나의 사랑법

2) 뿌리에 대하여

3) 두 개의 삽화

4) 저물녘 하늘, 그 여자 또

5) 어서 피어라, 어서

6) 우리 동네의 세 사람

7) 어느 개의 속말

8) 고통스런 일출

9) 추억들의 무덤

10)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4. 거대한 암흑의 도시에서

1) 딸에게 주는 편지(1)

2) 딸에게 주는 편지(2)

3) 콩을 심으면 콩이 나야 한다

4) 우리들의 도시

5) 장식론

6) 연탄가스 속에서의 산책

7) 대문에 관하여

8) 똑같음에 대하여

9) 값

10) 열쇠

11) 어떤 외출

12) 비틀거리는 演技

5. 노예들의 사랑(희곡)

1) 노예들의 사랑

-------------< 가슴에 남는 글....>-----------

그러나 화장한다 하더라도 뼈만은 말끔히 태울수 없다.

해골이나 무릎뼈, 엉치뼈같은 큼직하고 단단한 뼈들은 높은 온도에서도 쉽게 태워지질 않아 다른것은 다 재로 변해도 그런 것들만은 억척스럽게 굴러다닌다. 최신식 화장터에서 화장을 한다 하더라도 그 큼직한 뼈들의 단단한 죽음의 고집은 쉽게 꺾을 수가 없다. 다만 가족들에게 전해져서 않을 따름이다. ............< 중략>............

화장을 하거나 매장을 하거나 그 죽은 사람 자신에게는 매 한가지이리라.

다만 남아있는 사람의 평화의 환상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그들이 하고 싶을 대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은 자에겐 '아무래도 같을 수 밖에 없다. 자신의 흔적을 이 세상으롭부터 티끌하나 남기지 않고 철수 시킬수 없으니까. 그러므로 아무 사람이나 밟고 다니는 길바닥에 불어 죽음의 의식(儀式)을 없애고 싶은 것도 소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P 25

나는 언제나 그렇다.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질때에는 일부러 기다리거나 피해 버리는 버릇이 있다. 이런 버릇은 [나]에 대한 불확실한 확신때문이라고 나는 자주 생각한다. 그렇다. 솔직히 얘기해 버리는 게 좋겠다. 나는 소위 도장이라든가 이름이라든가 번호 따위같은 것에 너무 길들여 있어서 이런 따위의 증명이 나를 따르지 않을 때는 도저히 [나]를 확신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세계에는 사진이라든가 그보다 먼저 거울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때로 내 얼굴이 찍혀있는 한 장의 사진이 내게는 더욱 나다운 데가 있는 것이다. 또는 겨울에 비쳐진 내 얼굴을 나는 깜짝 놀라 한참씩 들여다 보기도 한다. 왜냐하면 거울에 비친 그 그림자는 적어도 객관적으로 확실히 나를 보여 줄 수 있는 [나]이기 때문이다.

이런 불쌍한 버릇은 하긴 꽤 오래 되었다. 내가 태어나면서부터락 말한다면 조금 과장이 되겠지만 아뭏든 나에게 최초의 의식이 들던 순간부터 나는 항상 [나의 불확실함]에 시달려 왔다. 물론 이런 불쌍한 버릇을 나는 아직껏 아무에게도 애기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나에 대한 불확실함]의 괴로움도 키가 자라는 만큼 더 자랐지만 꽤 잘 숨겨왔다.

그런데 언젠가 꽤 옛날 일이지만, 꼭 한 번 몹시 목이 말라서 참질 못하고 드러내 버린 적이 있다.

그때 그는 학교의 연극 클럽으로부터 연극공연에 참여하지 않겠느냐는 부탁을 받았는데, 한참이나 대답을 망설이고 망설이고 하다가 대답을 기다리는 선배에게 나는 [내가 꼭 필요할까요? ]하고 엉뚱하게 물어 보았다.

나의 물음을 들은 선배는 거꾸로 깜짝 놀라는 듯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참 우스운 질문이었다. P 30

***********물방울과 바위의 편지

안녕하세요?

기억하실지는 모르지만 나는 지난번 당신이 바닷가에 오셨을 때 보았던 많은 파도 중의 한 물방울이랍니다. 누구나 그렇지만 당신도 역시 넓은 바다를 보고 그런 다음 허옇게 밀려오는 파도를 보고 감탄하셨습니다. 그 파도 중에는 [나]라는 하나의 물방울이 있음에 대해선 생각도 안하시고 말예요.

당신은 집을 풀어놓자마자 유리창 밖으로 무수한 파도가 밀려오는 걸 마냥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 참 넓구나!]하고 중얼거리셨습니다.

그 말은 맞았읍니다. 참 넓습니다. 우리 물방울들이 살고 있는 이 바다라는 곳은 끝이 보이지 않으니까요 . 그러나 꼭 너무나 넓기 때문일까요? 저는 늘 외롭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생명을 가진 이가 이 곳을 바라보면 저는 묘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넓은 곳에서 우리 물방울들은 가끔 서로 이마를 부딪치면서 파도를 이루지만 서로 마음을 통하는 물방울은 없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얘기일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그저 부지런히 부딪쳐 파도를 이루고 또다시 헤어졌다간 다른 물방울과 함께 한 떼가 되어 파도를 일으킬 뿐입니다. 우선 파도를 일으키느라 바쁘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틈이 없습니다. 한 순간 함께 손을 잡은 물방울에게 이름이라도 물어 볼라치면 우리는 바다의 리듬에 의해서 곧 또 헤어져야 하기 때문에 우리 물방울들은 이렇게 넓은 곳에서 자유롭게 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외와 죽을 지경인 것입니다.

언젠가 고향 친구와 이마를 부딪친 적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 순간으로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다시 한 번 만나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애를 쓴다는 게 하긴 별 게 아닙니다. 될수록 열심히 떠돌아다니는 거지요-------한 번 의 부딪침,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몇 번 이런 끔찍한 일이 있은 다음에 저는 우리 물방울의 만남에 대해 아예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니 마음은 훨씬 평화로와졌습니다. 아무 물방울하고나 부딪치고, 손을 잡아야 할 때는 손을 잡고, 헤어져야 할 때는 미련없이 헤어졌습니다.

그런에 이런 평화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텅빈 것 같고 조금씩 열이 나는 것도 같고 하더니 아무 것도 즐겁지 않는, 무서운 병에 걸렸습니다. 가끔 날개가 하얀 물새가 날아와 얘기해 보고픈 의욕이 안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점점 저는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한 낮에 태양이 밝게 비칠 때도 저의 눈은 시커먼 어둠 속에서 빠져 나올 줄을 몰랐습니다.

이런 현ㅅ아은 날이 갈수록 더해졌습니다. 저는 아예 흔들림마저 잊어버린것 같습니다.

아마도 믿지 않으시겠지만 저는 잠들어 버렸습니다. 바다의 리듬에 따라 절로 흔들리며 늘 잠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저는 갑자기 제가 흔들림을 멎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꼈습니다. 아주 어렴풋이, 저는 맥없이 눈을 떠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저는 어느 조그만 바위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바다의 리듬이 나를 그곳으로 올라앉게 했던 것입니다.

글너데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앉아 있는 바위로부터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그저 웅웅--------하는 것도 같고 소근대는 것도 같고 여하튼 저의 귀를 기울이게 하는 소리였습니다.

한참만에야 저는 그 소리의 뜻을 해독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위의 말이었습니다. 바위는 자기 이름이 [바다의 향기]라는 것과 누구인가를 늘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러나 모두 바빠서인지 자기를 쓰다듬기 무섭게 떠나버린다는 것, 또 날개가 하얀 새들도 자기 위에서 잠시 쉬다가는 곧 어디로인가로 가버린다는 것...대체로 그런 애기였습니다.

한 번 얘기의 뜻을 알아듣기 시작하자 저는 별 노력없이 바위의 얘기를 전부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도 저의 얘기를 했습니다. 바다에는 나와 비슷한 물방울들이 많지만 끊임없이 출렁이기에 바빠서 우리는 아무 얘기도 할 수 없다는 것, 한 번도 같은 물방울을 본 적이 없다는 것, 나는 그저 바다의 한 부속품이라는 것, 누군가 항상 만나고 싶었지만 우리 모두를 바다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이상 그 누구에게도 나를 인식시킬수 없었다는 것, 그러나 나는 병이 들었고, 깊은 잠 속에서 한없이 수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는 것..대체로 이런 얘기였습니다.

바위와 저는 그러고도 수많은 얘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얘기의 끝은 언제나 [우리는 누군인가 만나야 해, 우리가 병이 들지 않으려면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어야 하고 만남의 결과가 있어야 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아프지 않습니다. 나를 기다리는 동안 저곳에 있는 이상 저는 모든 것이 즐겁고 예쁘게만 보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한 번 만났습니다.

저는 바위를 간질러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 바위는 그 독특한 웃음으로 향내를 풍깁니다. 저는 또 바위주위를 뱅그르르 돌기도 합니다. 그러면 바위는 점잖게 저의 그러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다른 물방울이 아닌 저의 모습만을.

바로 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위의 눈길에 의해서 저는 비로소 저의 실체를 실감하고 자신있게 다시 그에게로 다가갑니다.

감히 우리는 만났다고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당신이 바다만을 보시고 집으로 가셔서 저의 이런 즐거운 얘기를 모르시고 계시다고 생각하니 무척 괴로와 편지를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부디 만나시기 바랍니다. 만남은 모든 병을 낫게 합니다. 빠를수록 좋습니다. 만나십시오.

< 물방울과 바위 드림>

************용기를 가지자, 용기를

여기 모인 여러분들은 저에게서 시문학얘기를 듣고 싶어 오신 분들이란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변변치 못한 시 몇편을 발표한 시인이란 이름을 가진 저의입장에서 좀더 진실된 자세로 고백하자면 저는 매우 두려운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겠습니다. 놀랍게도 이제 저에게는 시를 쓴다는 행위가 별로 즐거운 행위가 아닙니다. 습작을 하던 시절에 , 또 시단에 처음 등단한 얼마동안은 시를 쓰는 행위가 저에게는 무엇보다 즐겁고 환희에 찬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시를 쓰는 행위가 두려움과 부끄러움으로 범벅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 두가지로 나누어서 생각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시를 쓰는 나 개인의 감정이며,

둘째는 시를 쓰는 나 개인의 행위와 역사와의 관계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 개인의 시작행위에는 쓴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한편의 시를 형성시키는 과정에서 내가 겪어야할 일종의 본질적인 회의입니다. 그 최초의 질문은 시는 나 개인을 해방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최초로 시를 쓰기 시작하던 때부터 지금까지 시는 인간의 모든 것을 해방시킬수 있어야 한다고 믿어 왔습니다. 인간의언어, 사고, 생활양식 같은 것이 그 해방의 주체들입니다.

저는 가끔 이 문제에 대해서 근본적인 절망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시 한 편을 놓고 거의 일년을 끙끙거릴 때도 있으며 아예 시작을 작폐해 버리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결점 투성이인 나는 나의 시적 이상에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실패작들을 뻔뻔스럽게 발표하곤 합니다. 이건 마치 히틀러가 마이크 앞에서 열변을 토하며 대중을 현혹시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말은 다시 말하면 시는 시론이라든가 기타 이론으로 지극히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만 쓸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둘째 번, 시를 쓰는게 개인적인 행위와 역사와의 관계에 이르면 한 편의 시는 그것이 성공작이든 실패작이든 객관적인 이론의 조준을 통과해야 합니다.

과연 이 한편의 시속에는,1978년 10월 31일, 한국에서 살고 있는 강 은교가 쓴 것이냐하는 최초의 사회적 평가를 요구받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회피할 수 없는 시인 강은교의 현실적 토대입니다. 내가 프랑스나 영국시인들의 세계에 심취되어 그 사람들의 사고나 관념으로 시를 썼다면 그것은 정신적인 모방에 그치고 말며 한국적 현실의 역사적 상황을 배신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문학이 아니라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정신적인 구걸행위에 다름 아닙니다

그런데 나는 과연 이런 역사적 배신행위를 나의 시 속에서 철저하게 분쇄했는가?

과연 민족적 평등관계의 시인적 양심을 추호의 가책도 없이 완수했는가 하고 반성할 때, 자연 두려운 감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시를 거의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히틀러가 마이크 앞에 서서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배신행위를 하지 않는것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용기가 생긴다면 저는 다시 붓을 들것입니다.

저는 저에게도, 힘이 없고 약하기만 한 저에게도 용기가 생기리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용기를 스스로 확인해 보기 위해서 이 자리에 여러분을 만나보려 나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 시의 현실과 삶의 현실....

시인은 무엇때문에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이미 전시대의 과제였다. 시인에게 주어진 오늘의과제는 < 무엇 때문에 시를 쓰고 있으며> 그 시를 쓰기 위해서 <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 시를 쓴다는 행위와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는 두개의 문제이다. 이 두문제는 사실상 별개의 문제로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까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지금도 이 두 개의 질문을 충족시켜 주는 시인은 우리 시단에 그렇게 많지 않고 극소수에 불과하다.........< 중략>.................

시인은 인간의 모든 적과 어쩔수 없이 적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양심적인 기본태도 위에서만 인간의 편이 될수 있다. 우리 주위에 인간의 적은 무수하게 많다. 멀리 공상적인 화성인 따위를 생각할 필요도 없이 우리 일상생활 속의 연속에서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인 크고 작은 적들이 무수하게 많다. 그 적들은 인간을 압박하고 착취하고 노예로 전락시킨다. 그 속에서의 인간의 삶은 주체적일 수 없고 존엄성도 찾을 수 없다. 시와 시인의 이와 같이 위기에 처애 있는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하고 그 정신으로 참다운 예술을 창조할 수없다는 것은 일종의 괴변에 불과하다. 또 문학은 어떠한 목적의 수단으로도 전락되어서는 안된다는, 지극히 순수, 타당해뵈는 주장으로도 모든 예술, 학문 또 모든 사회적 제도가 인간문제에 기여하기 위해 있다는 것을 부정할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엄밀한 의미에서 굉장히 새로운 문학 이란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있다면 영원히 추구하는 문학이 있을 뿐이다. 영구히 추구하는 문학, 그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현장과 문학의 현장이 괴리되는 갈등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 지구상에 인간이 멸종하지 않는 한 이 인간 문제에 기여하지 않는 문학은 지탄받게 될 것이다. P 76

*********** 나의 문학적 고백

나는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어쩔 수 없이 문학, 사회와 문학, 인간과 문학의 문제를 생각하여야만 했다. 나는 학교시절에 주로 외국문화에 심취해 있었는데, 내가 경도했던 사람들은 니이체, 하이데거에서부터 릴케 딜런 토마스, 제임스 조이스, 카프카, 포크너 등과 러시아 작가들 등 다양했다. 그들은 나에게 상당한 자극을 주었으며 나 개인적인 입장에서 볼 때 콤플렉스 같은 것까지 느끼게 했다. 나는 결코 그들과 같은 고뇌와 끝까지 싸워낼 수 없으리라는 콤플렉스를 .

한군문학에 대해서도 내 나름대로 읽어 보았다. 그러나 한국문학 작품이 나를 사로 잡았던 것은 그 시절 미안하게도 별로 없었다.

물론 나는 외국 문학 숭배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국수주의자도 아니다. 한국의 현대문학은 매우 다채로워 보이지만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빈약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고전쪽은 상당히 풍부하다. 판소리나 무가 등으로 눈을 돌리면 우리는 5천년의 한국문화가 결코 간단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그래서 주로 무가나 판소리를 찾아 같은 책을 몇 번씩이나 읽어보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외국문학이나 우리의 현대 문학보다 우리의 고전적인 판소리나 무가등에서 더더욱 깊은 감동과 함께 나 개인적인 실체는 물론 우리 사회의 어떤 윤곽을 찾아 볼수 있다는 점이었다. 하긴 내가 지금 까지 문학적인 방법을 차용해왔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서구적인 문학양식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문학정신은 사실 서구의 폐단틱한 지식이 아니라, 한국의 판소리나 무가에서 들을 수 있는 아주 슬프디 슬픈, 어떤 한 사람의 하소연 등에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자주생각한다. 나 자신 한국사람이므로 하긴 그런 맥락의 관계는 어쩔 수 없는 결론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런 문학정신에 연결되고 있는 것을 퍽 다행하게 생각하고 있을 뿐 아니라, 또 그것은 나같은, 이땅에서 시라는 것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가져야할 자세라고 믿고 있다.

나는 나의 시작태도의 근간을 주로 이와 같은 세계에 충실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가 제일 먼저 시도했던 방법은 판소리나 무가적 가락과 그 가락이 만들어내는 정신적인 형성을 나의 시로 형상화시키려고 노력한 것이었는데 그 결과가 시집 [풀잎]에 담겨져 있다. 그 시집에서도 특히 < 비리데기의 여행노래 > 라든가 <단가(短歌)> 같은 것은 겉으로 드러나게 무가의 형식과 냄새를 빌린 것이었다. 그 밖의 시들도 그 흐름은 본질적으로 이런 세계에서 얻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 [풀잎]이라는 시집으로 시단에 등단한 셈인데 그 반응은 비교적 우호적인 것이었다. 물론 이 시집은 시인이 여자였다는 이유만으로도 더 많은 우호적인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시인으로서 받은 피해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시집은 주제적 집약을 가리켜 사람들은 허무만을 얘기하고 있으며, 나한테 허무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여 주었다. 그러나 한 마디로 말해서 나는 허무주의자는 아니다. 내가 느끼는 허무는 우리의 삶 속에 드리워져 있는 실패의 내재성에 대한 일종의 저항적인 무기였던 것이다. 나는 이 삶 속에 내재되어 있는 본질적인 실패의 커다란 힘을 도저히 개인으로서는 이겨낼 수 없다고 절망해 왔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이 바뀐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철저해 졌다고 할까.그리고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그 철저해진 점이 더욱 나를 강인하게 현실 속으로, 우리의 역사 속으로 흡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누가 연설을 하거나 글을 발표하면 그 글의 내용에 진지하게 대하는 태도보다 먼저 그 글을 의심하고 경계하는 태도가 습관화 되어 버렸다. 그러나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불성실한, 소위 문화라는 이름의 탈바가지들이 얼마나 많은가? 단지 나는 그런 것을 구별하려는 것 뿐이다.

하긴 어느 때는 나 자신이 그런 탈바가지를 아무 부끄럼없이 쓰고 있음을 깨닫고는 자괴를 금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래서 내가 발표하거나 쓰고 있는 글 따위들이 모두 무가치하게 생각되어 원고지를 찢어버리거나 만년필을 보이지 않는 곳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만다. 도무지 활짝 피어나지 못하고 어딘지 모르게 위축되고 비뚤어져 있다는 기분이 나를 지배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풀잎]을 발표하자마자 나는 아주 어려운 병으로 쓰러졌었다. 지금으로부터 만 7년 전이 되는 셈인데 (나는 그 병의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지만) 그 병상에서 일어나면서부터 나는 나의 [풀잎]이라는 시집에 대해 내 나름의 반성을 해보았다. 그리고 내가 얻을 수 있었던 결론은 역사와 개인,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가 그 [풀잎]속에서는 결국 가볍게 취급되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나는 한 개인의 삶은 역사라는 커다란 흐름속에서 결코 한 개인의 삶 이상이 될수있다고 만약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약간의 환상주의에 빠져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 중략>.....................

나의 문학적 주제의 갈등은 아마 이런 문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이문제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의해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병을 앓고 난 이후 줄곧 이런 문제에 대해서 나의 시의 주제를 고정시키려 했다. 그래서 나온 시집이 [빈자일기]이다. 이 [빈자일기]는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도 반드시 성공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주제의 방향은 어느 정도 나타나 있기 때문에 내가 계속 그 방향으로 시를 쓸수 있을 것이라는 용기를 주었음에는 틀림없다고 말하고 싶다. P 81

우리집에 매일 아침이면 우유를 배달해 주는 우유 배달부의 시커먼 얼굴, 지난 여름 우연히 찾아 보았던 [몰골안]이라는 예쁜 이름의 시골과 그곳의 사람들, 뜰 가득 베어 넘겨져 있던 옥수수와 출출 내리는 빗속에서 옥수수 열매를 찾아, 껍데기가 군데군데 벗겨진 바구니에 담던 열 살 가량의 시골소녀, 그 소녀의 진흙빛 얼굴, 또 그 소녀의 어머니의 가난에 찌든 모습, 신용협동 조합을 이제 성공적으로 이끈다며, 거무튀튀한 얼굴에 사람 좋은 웃음을 짓던 조합장의 얼굴, 그의 부지런한 노동의 손, 어둠 속에는 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이들의 얼굴도 있습니다. 벌써 옛날에 이별한 아버지의 근엄한 얼굴, 죽은 아기의 얼굴,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들 모두 화알짝 웃고 있습니다. 즐겁고 해맑은 표정들입니다. P 83

***** 어둠 속에 묻힌 다정한 판화

선생님의 시는 머리로 쓰신 것이 아니라 이 다정한 소리에 젖어 가슴으로 쓰신 것이라고 . 그래서 평이할 수 있는 것이라고 .

어둠의 물살이 점점 빠르게 흐릅니다.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불뚝불뚝 일어섭니다. 그러나 쓸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식과 감정이 완전히 녹아 있는 시 , 그래서 한 번 읽으면 사랑스럽고 금방 이해되며 다정함에 한없이 끌려 들고 , 두 번 읽으면 그 부드러움, 사랑스러움 속에서 뭔가 긁직한 뼈가 만져지고, 그래서 그 뼈의 소재(所在)에 이끌려 세 번째 읽으면 그 부드러움, 사랑스러움 ...............< 중략>............

그리고 그 저 체온은 나에게도 자꾸 용기를 주는 것이었읍니다. 그 [용기]는 나에게 끊임없이 이렇게 속삭이고 있었습니다. [실패하라, 실패하면 어떠냐. 실패는 많을 수록 좋다. 진정한 시는, 산문은 그런 많은 실패 뒤에서만 얻을질 수 있는 것이다]라고.

그러고 보니 나는 너무나 안이하게 살고, 쓰고 있었습니다.

이땅의 모든 문학하는 사람들 처럼 나도 어느새 실패를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삶의 참모습을 드러내는데 인색해지고 있었습니다. 보기좋고 듣기 좋은 말로 분칠이나 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정의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그 시대 지성(知性)들의 사명일 것입니다...]

당신의 편지 속에 씌어져 있던 정의라는 말.... 나는 마치 한 대 세게 얻은 맞은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비틀거렸습니다. 난 도대체 뭘하고 있나, 하고. 그리고 그 날 밤 나는 밤새도록 내 만년필을 움직였답니다.

큰 어둠 속에서 놀고 있는 / 작은 어둠들에게 / 큰 안개 속에서 눈비비고 있는 / 작은 안개들에게 ./ 목쉰 천둥들에게 / 눈 먼 번개들에게. / 쓰레기더미에게 / 시드는 장미에게 . 페허에게 / 페허에 다시 올라서는 집에게 / 그리고 빛 속의 빛에게 / 바람 속의 바람에게 / 오라 / 언제나 가면서 / 언제나 오라. <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