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

 

	<< 그리움 >> 강우식   몇 천마디 말을 하고 싶어도 돌 갈은 입이 되렵니다. 캄캄 먹중 말 벙어리 되면 살며시 그리움 하나 자라겠지요.   텅 빈 하늘 끝에 걸린 그리움이 물처럼 소리죽여 흐르고 싶어 하면 발길 잇는 대로 보내렵니다.   그 강물 언젠가는 기진맥진해서라도 이 세상 어딘가에 사는 그대의 발아래 닿아 그리웠노라 하겠지요.   예까지 오는 길이 오직 그대 있어 와야만 했던 길이라고 속삭이겠지요     <<일몰 >> 고은 이 세상은 단 한번도 태어나지 말아야 할 세상인가   아니 이 세상은 단 한번이 아니라 여섯 번 일곱 번이나 태어나서 여섯 번 일곱 번이나 살아야 할 세상인가   해가 지누나     << 놀란강 , 아니고 >>  공광규 강물은 몸에 하늘과 구름과 산과 초목을 탁본하는데 모래밭은 몸에 물의 겸손을 지문으로 남기는데 새들은 지문 위에 발자국 낙관을 마구 찍어대는데 사람도 가서 발자국 낙관을 꾹꾹 찍고 돌아오는데 그래서 강은 수천 리 화선지인데 수만 리 비단인데 해와 달과 구름과 새들이 얼굴을 고치며 가는 수억 장 거울인데 갈대들이 하루 종일 시를 쓰는 수십억 장 원고지인데 그걸 어쩌겠다고? 쇠붙이와 기계소리에 놀라서 파랗게 질린강 아니고, 지금은 피 흘리는 강.     << 살청으로 푸른빛을 얻다 >>  권현영   푸른 기운을 죽여야 한다는 , 살청이라는 말이 놀라웠다 무쇠 솥에 찻잎을 덖어서 맛보는 자의 사지가 부드러워지고 혀의 독이 빠지는 순간   들끓는 생각이 묽어지는 그런 때를 말함이라면 껍질 안에서 이미 딱딱해지 있거나 아직 몸이 촉촉한 강낭콩의 푸른빛을 벗기고 앉아 있을 때 모처럼 둥근 고요가 양푼 가득 찾아오듯이   대청 아래 묶인, 흰 개의 눈을 들여다본다 짐승의 시간을 지나는 것이라면 무연하게 깜박이는 흰 빛을 말하는 것이라면 부칠 수 없었던 내 뜨겁게 시퍼런 문장들도 부디 살청이었길   어두워져가는 억양의 무쇠 빛 산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을 때 저녁 해가 손바닥만큼 남은 빛으로 지리산 골짜기의 광활한 비의를 거둬들이고 있다. 살청이다.     << 시인의 봄 >>  김경미 낯선 여직원과 서류때문에 말다툼 일 순간 유리창과 백목련 자목련 햇빛들이 몸 기울여 구경온다   입을 다무는 쪽만이 시인이 되는 것   그대도 어디선가는 분홍색 뺨이고 자목련이며 풍선 같은 애인이고 불쌍함이라고   소금심어 벚꽃 한 뒷박 얻는다     << 첫사랑 >> 김길녀 스물 셋, 늦은 겨울과 이른 봄 사이 구룡포 바다, 빨간 등대에 붙여놓은 긴 편지와 하얀 입맞춤 참, 이뻤던 그때...   << 냉담>> 김언 죽은자는 죽은 자답게 말한다 나 좀 치워 달라고 했던 말을 또 하는 주정뱅이는 주정뱅이답게 술값을 계산한다 누구보다 정확하게 어제는 만 원 오늘은 백만 원 매일 달라지는 월급봉투를 갖다 주는 남편은 매일 달라지는 가장답게 오늘은 덥다고 말하고 내일도 덥다고 말한다. 한 겨울에도 얼음이 얼지 않는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이 만나는 곳에서 죽은 뒤에 떠오르는 시체는 죽은 뒤에 떠오르는 시체답게 도로 가라앉는다 나 좀 데려가 달라고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을 하고 그가 돌아왔을 때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그를 알아보는 사람답게 냉담하게 말한다. 내 남편이 아니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전사자의 아내는 팔만 한쪽 남은 영안실의 주검조각을 들고 쥐어짠다. 이게 얼마만의 눈물이냐고   <<  가시나무 >>   김왕노 화목으로도 재목으로도 필요 없다하고 가시도 무서워하지 않으면서 밑둥치에 전기 톱날 대버린면 끝나지만 그것을 아나. 봄날 꿀벌 잉잉거리게 하는 힘인 줄은 아나 .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은 가시지만 이렇게 곧추세우고서 온천지 꽃향기 미친 듯 뿜어대는 봄날을 향해 거울 속으로 나서는 것을 알기나 아나. 내 겨울 꿈에 정조대 채우고 십자군처럼 떠나는 것을 알기나 아나. 겨우 내내 찬바람속에 파란잎의 기억묻고 묻어 겨울 찬바람에 하얗게 육탈시킨 넋으로 , 봄날 여기저기 반란처럼 시간의 구덩이에서 아카시아 꽃 미친듯 우려내는 정신을 알기나 아나. 정말 알기나 알면서 고개 끄덕거리나. 아부와 아첨으로 지문 닳은 네가 알기나 하나. 정말 알면서 씨부렁거리나      <<나비에게 >> 김인육 나 늙어서는 좀 고통스럽게 갈란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나는 외려 늙어서의 고생을 사서라도 해야겠다 내 만약 너무 행복하여 귀신처럼 늙어져도 이 세상 뜨기 싫으면 그 추함을 어찌하리 인간 번뇌 중에 사랑하는 이와의 별리가 가장 아프다는데 나, 떠나는 일이 고통이 되고 싶지는 않음이니 너무 행복한 늙음이랑 사양할란다 그러니 더 늙기전에 지금 좀 활짝 행복하면 안될라나 가슴에 확 불지르는 도적같은 바람이라도 다시 만난다면 또 어떨라나 꽃이 질 때 바람에 고요히 제 몸 맡기듯이 나, 갈때는 그리 가고 싶으이.   << 싱싱한 깃발 >>  나혜경 아찔한 바벨탑 이포보함안보에 나부끼는 깃발 몇 분 한강금강영산강낙동강 아픈 삽질에 대한 극진한 저항의 몸짓 온전했던 것이 비바람에땡볕에외로움에사람에 할퀴고 찢겨 너덜너덜 그래도 파닥파닥 펄럭펄럭 아득한 사막 끄덕없는 낙타걸음으로 흘러가는 그 발자국 여기저기 방사했는지 구석구석 비명처럼 참 싱싱하게 휘날려   <<금서>>  노명순 그는 나에게 금서였다   비밀의 금서는 그의 내부 미로의 마음속에서 발견되었다 마음과 두되의 좁은 낭하를 지나 여러 개의 골방을 헤매다 금서를 손에 쥔 나는 떨리는 손으로 손가락에 침을 묻혀 한 장 한 장 넘기어 갔다 그를 읽어 넘기는 동안 허기가졌다 혀가 아렸다 손가락에 묻은 그가 내 온 몸에 실핏줄로 스민다 나는 사막의 모래 속에 파묻혀 허우적 댄다 차양 없는 소켓처럼 뜨겁다 저 멀리 가물가물 넘실거렸던 현란한 물결, 난해한 그림, 복잡한 색깔, 모래더미를 들치고 어려운 텍스트를 향해 기어간다 해독 불가능한 파도가 덮친다 파도의 전류가 온 몬에 퍼진다 전류의 비늘이 번쩍 전구가 터져버린다   나는 끝내 그의 깊은 심연의 암호를 풀지 못한 채 내안의 여자를 토해내고 말았다   그는 나에게 금서였다.       << 너를 기다리는 동안 >>  문숙   무수동 정류소 앞 매미 한마리 비즘나무 몸통에 소리없이 붙어있다 긴 시간 비를 맞으며 허물을 벗고 있는 나무의 심장에 발을 뗐다 붙였다 저린 순간을 견디고 있다 푸른 신호등이 수없이 켜졌다 꺼지고 한 생이 스친 듯한 시간 비에 젖은 버즘나무의 껍질이 툭 떨어져 나간다 젖은 날개를 털어야 할때다     << 부처 >>  문인수 할아버지 먼 산 푸나무 하러 갔다가 참꽃도 한 아름 꺾어왔는데요, 우물가 큰 물독에 가득 채웠지요, 그때 참, 벅찬 할머니! 더 커다랗게 팔 벌려 합장 절했지요. 노구 너머로 환한 그 마음, 자동으로 나타나 엄청 아름다웠네요.     << 재미있는 책 >>   문정희 깊은 밤, 너를 안고 계곡으로 들어간다 나는 다소 변태 성욕을 가지고 있다 두 눈에 불을 켜고 하룻밤에 해치우려 한다 향기로 주파수를 맞추고 손가락으로 뜨거운 기억을 누르다가 이윽고 일진광풍 ! 양쪽날개를 쫙 펼친 내 심장에 심장을 포갠다.     << 재미있는 책 >> 문정희 깊은밤, 너를 안고 계곡으로 들어간다 나는 다소 변태성욕을 가지고 있다 두 눈에 불을 켜고 하룻밤에 해치우려 한다 향기로 주파수를 맞추고 손가락으로 뜨거운 기억을 누르다가 이윽고 일진광풍! 양쪽 날개를 쫙 펼친 내 심장에 심장을 포갠다   창밖에는 풀섶마다 새로 이슬이 태어나고 사마귀들이 기어나와 쿵푸의 자세를 취하며 원숭이가 되었다가 학이 되었다가 하지만 나의 욕망은 네 살속을 끝까지 파들어 간다 태양이 충혈된 눈을 비비고 다시 일어설때 흐트러진 침대 위에 다 파먹어 빈 조개껍질이 나 뒹군다.     <<셀트 누드 >>  박진형                        봄                 지문 봄속에 마밀린 몬로풍의 팔등신 복숭아나무 한그루 핸드폰 카메라로 셀프 누드 찍어 실시간으로 전송한다 팔십비컵 발그란 유두에 옴팍한 배꼽 우물에 애간장 고인다 생뚱맞은 하초도 달랑  달  고     << 할 >>            서상만    -  막고굴에서   은유가 머뭇거리다 가는 구석에는 늘 상징하나가 탁본된다 둔황 막고굴 와불에는 가섭에게 내민 발가락이 닳아있었다 지워지지 않는 천년을 매만지며 그렇게 빤질하게 닳아 있었다 그날 문득 윤달수의도 못입고 가신 울 엄니 생각이 났다 지금쯤 하얀 고무신 끌며 몇 만리 밖을 가고 있는지, 그 길목 뒤따라가는 나를 휙 뒤돌아본 듯 번쩍 내 이마를 스치며 비천하는 천녀의 그늘을 보았다!       << 수월관음도>> 신명옥   단풍잎 한 장 들고 당신의 내면으로 들어갑니다 신국향기가 번지는 길을 걸으며 당신의 체취를 느낍니다 누리장나무 붉은 꽃받침 속에 여문 씨앗이 푸른 눈망울을 깜박입니다 발 앞에 툭툭 던져놓는 상수리 열매를 보며 뜨거운 시간을 거두어 익힌 당신의 꿈을 봅니다 산자락 통나무집 뜰에는 박각시들이 층층이 꽃위에서 날개를 빠르게 휘젓고 산 그림자가 이른 저녁을 몰고 옵니다 산비탈에 앉은 나를 노을이 한 장 단풍잎으로 물들이고 빛과 어둠 사이 갈라진 틈으로 거대한 적막이 밀려옵니다 혼자 남은 어둠속에서 별들이 하나 둘 찾아옵니다 풀벌레들이 적막을 깨우며 제 이름을 부르고 탁탁 튀는 장작 속에서 당신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제 몸을 다 태운 불빛들이 캄캄한 공중을 돌아 어둠너머로 날아가는 걸 지켜봅니다     <<  그늘 >> 이상국   누가 기뻐서 시를 스랴 강가에서 새들은 날아가고 때로는 횡재처럼 눈이 내려도 사는 일은 대부분 악착같고 또 쪼잔하다 그걸 혼자 버려두면 가엾으니까 누가 뭐라든 그의 편이 되어 주는 것이다 나의 시는 나의 그들이다     << 진 . 달. 래>> 신미균 미나리아재비과의 홀아비 바람꽃과 긴꼬리부전나비가 몰래 불륜을 저지르려고 하는데 수다스런 바람이 둥근매듭풀과 노루오줌풀에게 소문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싱숭생숭하게 벌건 소문만 산비탈에 뭉게뭉게 피어나는데   "진짜 달라면 줄래?" 떠돌이 유머를 아무리 연습해도 입 밖으로 말 꺼내볼 사람조차 없는 사십 고개넘긴 홀아비 조카 혼자서 산비탈 돌밭을 종일토록 갈아엎고 있습니다   꽝꽝 얼렸다 씹어 먹고 싶은 파란 하늘입니다     << 개옻나무>> 심호택 진달래나 고사리 꺾으러 산길 오르내리다 때죽나무 가지 따위 걸리적거리면 무심한 농부처럼 황새목낫으로 사정없이 쪄버릴 줄도 알게 되었으니 나도 예전의 내가 아니지만 그러는 중에도 간혹 내 앞에 귀찮게 얼씬거리는 개옻나무 하나 큰마음 먹고 놓아두면서 이 다음 가을이 깊어졌을 때 누군가 근처를 지나다가 단풍이 곱기도 하다고 주홍빛 물든 그 이파리들 앞에 잠시 발길 멈추게 되기를 바라는 일도 있는 것이다.   << 문경 옛길 >> 안도현 가파른 벼랑 위에 길이, 겨우 있다   나는 이 옛길을 걸으며 짚어보았던 것이다 당신의 없는 발소리 위에 내 발소리를 들여놓아 보며 얼마나 오래 발 소리가 쌓여야 발자국이 디고 얼마나 많은 발자국이 쌓여야 조뭇한 길이 되는지   그해 겨울 당신이 북쪽으로 떠나고 해마다 눈발이 벼랑끝에 서서 울었던 것은,   이 길이 , 벼랑의 감지 못한 눈꺼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보았던 것이다     << 그렇게 사귀고 싶습니다 >>  유승우 공기와 사귀고 있습니다. 몸이 알아서 하는 짓입니다. 생각해서 숨을 쉰다면 사귀는 게 아니지요. 깜빡 잊고 숨이 멎을 수도 있으니까요. 숨을 쉬는 것은 몸이 알아서 하는 기도입니다. 벌레들은 땅속에서도 숨을 쉬고, 물고기들은 물속에서도 숨을 쉽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고익와 사귀는 것입니다. 이런 사귐이 참사랑입니다. 몸이 알아서 공기와 사귀듯이 마음도 알아서 빛과 사귀면 좋겠습니다. 몸이 알아서 기도하듯 마음도 알아서 기도하면 세상이 환해지겠지요. 그렇게 빛과 사귀고 싶습니다.     << 징 >>  육근상 징이여, 바람의 손잡이를 잡고 등짝을 한 번 후리쳐봐 울림이 클탱께   아궁이 단속이 심했던 대장장이가 벌겋게 달아오른 노을을 마흔아홉번이나 두렸다 폈다 만들어낸 걸작이 바로 저 강이여   동담티 무당년이 찾아와 낚아채듯 뺏아간 날이 아마 그믐이었지 빨간 깃대가 펄럭이고 아침저녁으로 울부짓는 소리 들리지 그 집이 몸 땡이 풀어 놓은 단디 주인년이 나이도 많고 고집불통인데다 말도 통하지 않아 맨날 굿판이 벌어지고 있지   내가 징이여 , 소리에도 색깔이 있어 울림 큰 음색이 특장인디 워쩌 오늘밤 한번 둘어 볼텨 징채라도 있으면 맘껏 후리쳐봐 이빨 꽉 깨물고 견뎌 볼 탱께     <<각을 뜨다>>  윤문자 마음에도 결이 있다 서툴러서 자칫 뼈를 다치게 할 대도 있지만 결 따라 잘만 다루면 치욕의 뻐들로부터 살을 잘 발라낼 수도 있다 너무 날이 선 것도, 이가 빠진 날도 안 된다 잘 벼려진 칼날로 신중에 신중을 기할 것 ! 조그마한 흔드림에도 용납하지 말 것! 생각의 삐죽한 각을 떠내면 그대로 꿀떡 삼킬 것!     << 상흔 >> 윤의섭 이슬비에 곤두선 꽃 대궁이 향기는 여름이 지나도록 아물지 ㅇ낳았다 누가 꺾기도 전에 꽃은 꽃끼리 아프다 둘러보면 모조리 상흔이다 빗방울 화농, 누선을 따라 번져가는 구름 종양, 아무한테도 보이지 않아 홀로 썩어가는 바람은 제 몸을 이식하며 연명한다   노을 처럼 깊은 상처는 말을 할 줄 안다 늘 도지므로 늘 같은 말이다 낫지 못할 것이다   살면서는 아무도 치유된 적 없다 별조차도 불치의 기원을 모르며 흘러나오는 빛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 피인 줄 달 역시 모른다   낫지 못할 것이다   이 가장 오래 된 빗나간 적 없는 참언     <<  파문 >>  이공 돌의 날개를 본 적이 있다.   당신 생각만 해도 어둑해지던 강가 당신 생각으로 굳어져버린 돌 하나 다음어서 물수제비 뜰 때 떠오를 듯 가라앉을 듯 더 멀리 보내지 못한 채 멎은 자리.   미련처럼 가라앉아버린 그 자리에서 온통 당신 스치고 간 흔적밖에 없다고 둥근 날개 펴고 다시 내게로 돌아와 손등을 적시는 파문.   돌의 날개로 젖은 손등 말려본 적이 있다.     <<  너는 내운명 >> 이문재 예술가란 한 사람만을 사랑 할 수가 없어서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지식인이란 인류를 사랑하느라 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성인이란 우주 전체를 사랑하기 위해 자기자신을 없앤 사람이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법을 몰라서 풀 한포기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 파도 >> 이성배 바다에 울려왔는데 파도가 먼저 와 울고 있다 푸른 눈알에서 밀려오는 수평의 눈물이 하얀 포말로 백사장을 적신다 그 눈물 속에 내 눈물방울 더하며 파도와 내가 함께 우는 날 남자가 크게 한 번 우는 날   <<처음 >> 이수익 옛날에 이미 다 있었다더라. 장엄하고 눈부신 최후의 걸작들은 수천 년 전 장인들의 손으로 이루어져 지하 수십 미터 깊숙이 땅속에 묻혔거나 세상 사람들의 눈길보다 훨씬 더 먼 곳에 감추어져 있어 오늘 우리의 손을 차마 부끄럽게 만드나니, <처음>이라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이미 지난 날 이었던 일 당신은 한번 헛손질함으로써 최초화는 아득해지는 것이니 언제 또 다시 개벽의 새아침을 뚫고 나올 어마어마한 역사의 힘이여. 무기력해지는 우리네 마음이여     << 이승하 씨 별세하다 >> 이승하 신문 부고란에서 동명인이 부고르 ㄹ본 날 나와 똑같은 이름으로 살다 간 이승하 씨 장례식장에 가야만 할 것 같다 이승하니까 이승하 씨에게 조문해야 할 것 같다   이승하! 승하야!승하씨! 이군!이 서방! 이 일병! 존경과 멸시 사이에서 그리움과 외로움사이에서 이름은 불리어지고 이름은 떠돌고 이름하나 남기고 나도 사망할 것이다   별명은 무엇이었을까 뒷짐 지고 걷는다고 내 별명은 '영감'이었는데 그대 한자로는 어떻게 썼을까 나는 오를  昇에 여름 夏     임금이 죽은것을  昇遐 라고 했으니 우리 이름에는 애당초 죽음이 깃들어 있었던 것   잘 죽었소? 많이 아프지 않고? 내 죽어 신문한 귀퉁이 부고란에 이름 석 자 적히는 어느 날 또 다른 이승하 씨가 자기 이름 본다면 죽음을 길들일까 혀를 차며 동정할까   신문지 접어들고 잠시 묵념한다     << 예술은 협잡이고 사기다>> 이승훈 예술가들은 자아바엉에 실패한 자들이 많고 언제나 신경증 히스테리 강박증과 싸워요. 그럼 창조행위란 뭐냐? 그건 방어 실패를 극복하는 행위예요. 병 때문에 시를 쓰고 시를 쓰며 병을 치료한다. 역설이지. 병이 병을 치료하는데 과연 치료되는가? 쓰러져가는 이 낡은 건 물, 나의 협잡, 신경증에서 벗어날 수 는 있지만 나를 치료할 수는 없다. 샤르트르의 말입니다. 병이 든 나는 쓰러져가는 낡은 건물이고 글쓰기는 한 마디는 협잡이다. 예술은 사기, 속임수, 기만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일생가요. 정신병은 일생가는 겁니다. 치료는 무슨 치료? 진정제 먹고 견디죠. 시쓰기가 진정제야. 그런데 멀쩡한 인간들이 무 슨 시이고 예술입니까? 그런 인간들은 정치를 하거나 장사를 하면 돼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일생을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 완벽한 논리에 매달리죠. 논리는 외부세계를 단념하는 방 법이야. 시 쓰기도 단념하고 체념하는 방법으로 나가야하고, 마침내 쓰러져가는 이 낡은 건물도 환상이라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 시계 박물관 >> 이영식 시계가 문제다   안방 건넛방 주방까지 접수한 시계들 서로 모양새가 다르고 시침, 분침 지나는 숫자도 다르다 제각각 장전된 아람으로 먹고 자고 학교 가고 출근한다   거실 기둥시계가 종을 쳐보지만 시차극복은 구시대의 유물 약발이 먹히지 않는다 각 방에서 마우스를 클릭하는 , 시계는 한 달에 한 번 식탁에 모여 앉기도 어렵다 소통을 꿈꾸지 않는다   텅 빈 집 장식장 속에 늙은 시계가 갇혀 있다 톱니 몇 개를 돌리지 못해 내장은 서서히 녹슬고 시간의 뼈다귀는 미라가 되어간다.   시계와 시계사이 크레바스를 살짝 덮은 꽃무늬 벽지 애써, 활작 피었다.     << 폭설>>  이재무 저, 거대한 책을 보라. 조물주가 날밤 새워 쓴 차고 딱딱한 적층의 빙어들 열리지 않는, 입 꽉 다문 페이지. 빛 반사하며 지상의 온도 빼앗는 불온의 예언서, 백색테러, 하늘이 내린 계엄령, 철없는 벙어리장갑들 눈덩이 굴리는 놀이에 빠져있고 미래의 어느날 새로운 기원을 위해 노아의 방주 불쑥, 하얀 경전을 열고 나올 것이다.     <<  첫눈 >> 이진엽 문득 깨어나 창문을 열어보니 새벽의 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수만 자으이 흰 전단을 뿌리며 온 세상으로 번져가는 조용한 외침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좌파도 우파도 아닌 어둠도 밤의 아들도 아닌 오직 피가 맑은 무정부주의자들이 일으킨 새벽이 하얀 반란   나는 마음속으로 손뼉을 짝짝 쳤다.     <<  스님, 불 드어갑니다 >> 이충희 어서 나오세요 !!! 마지막 예 禮  까지 마다하신 관도 수의도 만장도 조사도 없이 내가 어떻게 가나 보라시던 말씀따라 무소유의 간결한 법어 法語 를 놓고 가신 스님 ! 나오시란다고 나오실 리 만무하지만 너무 안타깝고 너무 송구해 도리없어 빌미로 외친 절규라는 걸 아셨을까 스님, 불 들어갑니다. 어서 나오세요 !!! 이도 결국 이승의 위안이었네 스님, 그래도 어서 나오세요!!!     << 2009년 12월 15일의기록 >>  정희성 암수술 받고 병원 문을 나서다 보니 골목 한켠으로 영안실이 눈에 들어오고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의 내일을 위해 인쇄소는 새해 달력을 찍느라 분주하다 생각느니, 죽음과 삶의 경계는 무엇인가 후미진 세월 모퉁이에서 몰래 만나 입 맞추듯 서로 피를 빠는 이 황홀경!     << 시인이 시인에게 >>  천양희 시인으로 사는 삶의 고통을 백지의 공포라고 말한 시인에게 소외가 길을 만드는지 햇살 속으로 망명하고 싶다던 시인에게 잘못든 기이 지도를 만든다넌 시인에게 운명을 걸지 않았다면 돈도 밥도 안되는 시에 순정을 바치지 않았을 것이라던 시인에게 떡라수에 빠져죽은 굴원의 굴욕을 생각한다던 시인에게 모래를 게으른 평화라고 말하던 시인에게 먼 눈송이와 가까운 눈송이가 폭설을 이룬다던 시인에게 조용한 일이 고마운 일이라던 시인에게 잠들기 전에 다소간의 눈물을 흘리다던 시인에게 고통은 누구도 대신 할 수 없으므로 위대하다던 시인에게   나는 쓴다   울분을 함께 나눠가지면 안되겠습니까?       << 메마른 생각들만이 >> 최승자   우주는 생각들로 가득 차있다 그 생각들에 슬슬 젖어 가느 게 일류라는 걸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우주는 생각들로 가득 차있다 우주는 생각들의 비로 가득차 있다   한때 비 내렸건만 이미 비 지나가고 또 오건만 비 젖는 줄도 모르고 걷기만 하는 사람들   메마른 생각들만이 허허롭게 걸어다니는 이 거리     << 뭉크의 돼지 >> 허연   가끔 내 상상력 밖에 있는 괴물들이 나오는 영화를 본다. 그때마다 언젠가 나를 고민에 빠지게 했던 그 돼지가 떠오른다.   십수 년전 돼지파동 았을 때, 우연히 시골에서 보 ㄴ돼지, 사료값도 안나온다고 그냥 내버려진... 오래 굶어서 코 모양만 돼지고 몸매는 개를 닮았던 그 돼지, 뭉크의 그림 같은 돼지.   소크라테스와 대척점에 있다고 비난받아 온 돼지가 소크라테스 보다 더 고뇌에 빠져보였던 그 날. 아주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던 뭉크의 돼지가 요즈음 부쩍 생각이 난다.   수요공급 곡선을 이탈하면 모든 건 괴물이 되는 것일가. 괴물이 되어 버린 돼지가 자주 꿈에 나왔음은 물론이고 .   매일 아침 동북아시아 어느 대도시에서 전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뭉크의 돼지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 그리움 >> 박시교   그립단 말 함부로 한 내 죄 늦게 알았네 외로움과 혼동하여 마구 썼던 것까지도 그러니 어쩌겠는가, 사람이 그리운 걸 일부러 산 밑 먼 길 휘돌아 흐르는 강 풍경하나 멈춰 선 듯한 그 적막이 서러워서 알았네. 애써 눈물 삼켰던 어릴 적 죄 키웠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