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의 텍스트는 읽지않고 그저 가지고만 있어도 밥을 먹은 것처럼 든든하다.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나도 모르게 든든해지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문학동네 카페에 연재되던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이 책으로 발간되었다. 알고봤더니 나는 작년엔가 그 카페에 연재되던 글을 프린트해 놓고선 그 소설가의 일과 이 소설가의 일이 같을 거라고 생각조차 못했다. 

책을 읽을 때면 인상적인 구절마다 포스트잇으로 체크를 해 놓곤 하는데 이 책은 금방 읽어내 버릴 것같아 일부러 깨끗한 상태로 책을 읽었다. 책이 발간되자마자 주문한 뒤 읽는 데까지는 시간이 별로 안걸렸는 데도 불구하고 리뷰를 쓸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좋은 책에 대한 리뷰를 너무 잘 쓰고 싶어서 내내 '생각만' 하다가 리뷰가 늦어지고 말았다. 김연수 씨가 '생각만' 하지 말고 글을 쓰라고 그렇게 말했음데도 말이다.

제목만 소설가의 일이고 내용은 일반적인 에세이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은 정말 소설을 어떻게 적는지에 대한 소설 창작론에 속해있는 책인것 같다. 내가 이 책을 얼만큼 좋아하냐하면 이 책을 읽고 소설가를 쓰는 지망생이 되고 싶었을 정도이다. 김연수 작가가 소설을 쓰는 사람들에 대해(특히 아직 소설을 쓰는데 익숙치 않은 사람들) 얼마나 애정을 갖고 자신이 알고 있는 바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해주는 지 이 책을 읽게되면 누구라도 그가 이야기하는 대상이 되기 위해 소설을 쓰고 싶어 질 지 모른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내용은 소설가가 가장 많이 해야 되는 일은 바로 소설을 쓰는 일이라는 점이다. 김연수씨가 하도 강조를 해도 책을 읽을 뿐인데도 귀에 딱지가 얹을만큼 그는 소설을 꾸준히 쓰라고 말한다. 생각은 쓰는 일 다음에, 자신이 소설을 잘 쓰는지도 생각하지 말고 우선 소설을 많이 써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에세이에서도 그렇듯 김연수 씨는 이런 방법론을 가르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내용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전혀 강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이야기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빗대어 일방적인 가르침이 아닌 대화를 시도한다. 예컨대 아래와 같은 식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당연하다는 듯이 매일 뭔가를 만들었다. 그렇다고 맛이 획기적으로 나아지거나 갑자기 나빠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팥죽과 팥빙수와 햄버거 패티와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세계는 오랜 친구처럼 늘 어머니 곁에 머물렀다. 스무 살의 내가 역전 근방에서 매일 몇 편씩, 때로는 몇십 편씩의 시를 노트에 쓸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를 비롯한 동네 가게 주인들의 세계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획기적으로 나이지지도, 그렇다고 갑자기 나빠지지도 않는 세계 속에서 어떤 희망이나 두려움도 없이 마치 그 일을 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일하는 사람들의 세계 속에서. -p19

그리고 헤밍웨이도 말했듯이 김연수 씨도 열렬히 외치는 한가지 이야기가 또 있다. 바로 '세상의 모든 초고는 쓰레기'라는 점이다.

내가 쓴 초고를 보면 내 머리통은 무슨 음식물 쓰레기통처럼 느껴진다. 글을 쓰려면 초고를 써야만 하는데, 초고를 쓰면 글을 쓰기가 싫어진다. 이게 창작의 딜레마다. 어쨌거나 그렇기 때문에 초고, 그중에서도 제일 처음에 '머리에 떠오르는대로 빠르게' 휘갈겨쓴 글은 내 일생일대의 약점에 해당한다. -p34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소설가가 아닌데에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내가 쓰는 글이 쓰레기같아도, 그것이 굳이 글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있어서의 이야기라도 헤밍웨이와 김연수의 그것마저 쓰레기라는 데 내 초고가 쓰레기가 아니고 별 수가 있나 라는 생각에 왠지 모를 동질감(?)마저 느껴진다.

디테일하게 어떤 식으로 소설을 써야하는 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우선 소설에는 캐릭터 중심으로 흘러가는 이야기와 플롯 중심으로 흘러가는 이야기가 있다고. 캐릭터 중심은 그의 심경 변화에 대해 

주인공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이야기에서 가장 사랑할 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사랑할 만한 사람'인가는 다들 생각이 다르겠지만, 나는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매력이란 그가 자신의 한계를 온몸으로 껴안는 행동을 할 때(그간의 우리 용어로 치자면, 생고생할 때), 그걸 지켜보는 사람(작가나 독자)의 내부에서 저저로 일어나는 공감의 감정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이 공감의 감정 없이는 작가는 한 줄의 문장을 쓰기 어렵고, 독자는 한 페이지를 읽기 어렵다. 형편없는 인간이 나와서 주인공이랍시고 멍청한 소리를 늘어놓는 소설을 쓰는 것보다 더 힘든 건 그걸 읽는 일이다. -p69

독자의 입장에서 우리는 항상 우리보다 잘 저지르는 사람에 대해 매력을 느끼고 자꾸만 보고싶어 한다. 인터넷 상의 일반인 중에 특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터뷰 아래에는 항상 '용기가 부럽다'라는 댓글이 있다. 그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현실적인 문제나 한계를 뛰어넘을 만큼의 용기나 행동력이 덜했을 때, 우리는 인터뷰이가 아닌 인터뷰를 보는 독자가 되는 것이다. 사실 그 사람들과 우리의 차이는 없다. 단지, 그 결정을 내리고 실행을 하느냐 마느냐의 차이일 뿐인데, 그 차이가 그만큼 단순하지는 않은가 보다. 그래서 드라마나 소설에서 우리는 항상 무모하게 도전하는 사람의 편에 서기 마련이다. 위험에 빠질 것을 알면서도 적진에 뛰어든다던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커리어를 버리고 해외로 훌쩍 떠난다든지 하는 사람의 편.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가능성이 많다. 

이 밖에도 이 책에는 정말 자세하게 어떻게 하면 소설을 쓸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과 김연수 씨는 실제로 어떻게 글을 써왔는 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와있다. 더이상 글을 길게 쓰다가는 여기에 이 책을 복기하듯이 인상적인 구절을 줄줄 읊으며 찬양 일색이 될 것 같아.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를 남기며 리뷰를 얼른 끝내야겠다. 

그러니까 다시 태어나려면 일단 나부터 죽어야 한다. 죽지만 않는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한번 다시 태어나보겠지만, 죽지 않고 어떻게 다시 태어나나? 내 몸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 돌이켜보면 이십대의 문제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이 되려면 제일 먼저 내가 바귀어야만 한다는 것. 다시 태어나려면 일단 내가 죽어야만 한다는 것. 모든 건 내 쪽의 문제였다. 

그런데 나는 가만히 놔두고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하니까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셈이었다. -p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