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고 내 속으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다라는 생각만이 나를 채웠다. 그런 생각이 날 닳게 했다. 끝이 갈라지고 그 끝이 안쪽으로 타고 들어가더니 결국엔 나를 너덜거리게 만들었다. 깨끗하게 잘린 단면이라면 좀 나앗을런지 모른다. 아니다. 이렇게 너덜거리는 것을 보니 그러한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만약 깨끗하게 잘렸더라면, 날카로와 아팠다며 엄살을 피웠을테다. 난 이래저래 난 엄살을 피웠을 것이다.

 

 생각만으로 시간을 채웠고 버렸다. 무언가에 빠지면 좀 견디기가 수월했을텐데 알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이야기로 가득한 글을 읽거나 일깨우는 글을 읽어도, 글이 아닌 글자로만 머물렀다. 그 어느것도 날 바로 세우지도 그렇다고 멈추게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서성이면서 가는 시간을 바로도 아닌 곁눈질로 보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 그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만 있었다.

 

	3   절정을 모르는 꽃 시듦도 없지       4   내가 나의 꽃 아직도 기다리듯 너는 네 허공을 지고 거기까지 가야 한다 우리 불행은 피기도 전에 시드는 꽃나무를 너무 많이 알고 있는 탓 아닐까? 추위도 더위도 모르는 채 어느새 갈잎 드는   활짝 핀 꽃이여, 등 뒤에서 나를 떠밀어다오 꽃대의 수직 절벽에서 낙화의 시름 속으로!
페이지 : 20 "꽃을 위한 노트" 중에서

 

 절망의 계절임을 알면서도 예전처럼 마음껏 절망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도 들었고 죄책감까지 들었다. 그것에 매달리지 않고 있다고, 난 가까움에 두렵지 않다라는 생각을, 가끔은 오히려 기다리고 있다라고 솔직히 말할 수 없었다. 내 솔직함이 오히려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 있음에, 오히려 누군가에겐 배부른 투정으로 들릴 수 있음에.

 

 그 솔직함이 사실, 내 마음의 짐을 덜고자 내 짐을 다른 사람에게 넘져준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외로움이 미끼       바다가 너무 넓어서 한 칸 낚시대로 건져 올릴 물고기 아예 없으리라 줄을 드리우자 이내 전해져온 이 어신은 저도 외톨이인 바다 속 나그네가 물 밖 외로움 먼저 알아차리고 미끼 덥석 물어준 것일까 낚싯대 쳐들자 찌를 통해 주고받았던 手談 툭 끊어져버리고 미늘에 걸려온 것은 외가닥 수평선이다 외로움도 지나치면 해 종일 바닷가에 서서 수평선에 이마 닿도록 나도 한 마리 마음물고기 따라나서지만 드넓은 바다 들끓는 파도로도 더는 제 속내 펼쳐 보이지 말라고 자욱하게 저물고 있는, 저무는 바다 그 파랑 속속들이 헤매고 온 물고기 한 마리 한입에 덥석 나를 물어줄 때가지 나 아직도 바닷가에 낚시 드리우고 서 있다 어느새 바다만큼 자라 내 앞에서 맴도는 물고기 한 마리 마침내 나를 물고 자 어둠 한가운데 풀어놓아줄 때까지
페이지 : 26 "외로움이 미끼" 전문

 

 그래서 이 시집들의 시가 좋았다. 내 속마음을 타인의 시 속에서 발견하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제 어미 품이라면 이만큼은 벗어나려고 막 배우기 시작하는 자맥질인지 캄캄해지는 물속으로 열 번 스무 번 거듭 곤두박이지만 아니 고개를 쳐드는 숨찬 새끼오리 한 마리 아직도 깨치지 못한 수심이라면 지금 겨울 초입이니 엄동이 수면을 닫아걸기 전 너도 이 막막함에 어서 익숙해져야지
페이지 : 94 "고복저수지" 중에서

 

 그저 보여주기만 한다. 허나 보여주는 것들이 예사롭지 않다. 그리고 흔한 눈으로 보지 않는다.

 시간속에 갇혀 있는 나는 가만히 시집을 넘기며 시인이 보여주는 것들을 보고 만났다.

 그렇게 시는 더이상 글자가 아녔다.

 

	말년의 프로이트가 도달한 결론, 원래 인간은 무엇인가에 휘둘리는 가련한 존재일 뿐이라는 생각과 맞닿아 있는 듯하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가련한 존재라는 것, 그러나 그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희곡 작가 최인훈이 그려내고자 한 인간의 모습인 것. 우리가 이들 인간형을 지켜보는 것은 끝까지 고통스럽다. (2009)
페이지 : 502 "해설 / 설화적 형상을 통한 인간의 새로운 해석 / 김만수" 중에서

        :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최인훈. 문학과 지성사. 3판3쇄. 2013년 3월.

 

  내 마음속의 것을 제대로 끄집어 내지 못하고 있다.

 방법을 제대로 몰라서도 있지만 아직도 무언가에 자유롭지 못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이렇게 읽으며

 너덜거리는 마음을 들여다 보거나 혹은 더 너덜거리게 내버려두는 것 뿐이라는 것만 인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