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열하일기 상>을 읽으면서 내내 즐거웠다. 남의 여행기를 읽으면서 부러워하는 것은 답답하고 재미없는 일이라지만, 다리를 다쳐 이래저래 나다닐 수 없었기에, 게다가 지난 해에 티벳을 다녀왔기에 그곳을 그리워하면서 조금은 동병상련의 기분을 느끼며 아주 즐겁게 읽었더랬다. 그랬기에 서둘러 <열하일기 하>편을 구입했었다.

 

 하지만 밀린 책들이 많았고 워낙 방대했기에 책장에 꽂아두고 군침만 흘렸었다. 그러다가 겨울로 접어들면서 이 책을 머리맡에 두고 겨울 내내 집어 들었다. 아껴가며 날짜별로 아주 조금씩 꺼내 읽었다. 맛난 곶감을 겨울내내 조금씩 꺼내 먹는것처럼 말이다.

 

 역시나 즐겁다. 방대하고 어려운 내용이 나를 자주 수렁에 빠뜨리기도 했지만 한번에 후다닥 읽는 것이 아니라 졸리면 그냥 자고 혹은 읽다가 밤을 새기도 하면서 즐거이 삽입된 내용과 사진과 그림에 빠져들며 읽었다.

 

	아아, 사람들은 늘 스스로를 보고자 하나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그런즉 때로 바보나 미치광이처럼 다른 사람이 되어 자신을 돌아볼 때야 비로소 자신이 다른 존재와 다를 바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얽매임이 없이 자유로워진다. 성인은 이도를 운용하셨기에 세상을 버리고도 번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어도 두려움이 없었다. 공자는 '남이 나를 알아 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느냐' 하였고, 노자도 역시 '나를 알아주는 이가 드물다면 나는 참으로 고귀한 존재로다' 하였다.
페이지 : 97 "관내정사 / 8월 4일" 중에서

 

 이런 부분을 읽으면서 자주 나를 반성하고

 

	천장을 우러러 보니 수많은 어린애들이 오색구름 속에서 뛰노는데, 허공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 손으로 만지면 살결이 따뜻할 것만 같고, 팔목이며 종아리는 포동포동 살이 쪘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놀라서 눈이 휘둥레져 떨어지면 받을 듯이 손을 바치고 고개를 젖혔다.
페이지 : 112 "관내정사 / 북경의 이모조모 / 서양화" 중에서

 

 천주당(성당)에서 벽에 그려진 서양화속 어린애들(아마 천사인 듯)을 보면서 서술하는 부분은 귀엽기도 하고 솔직해서 공감도 가고 박지원의 기분이 고스란히 전달되며

 

	아까 관내에서 잠깐 술을 마실 때 몇 잔을 더 사서 안장에 매달아 두었던 것을 모두 쏟아 별빛 아래에서 먹을 갈고, 찬 이슬에 북을 적셔 크게 여남은 글자를 썼다. 이때는 봄도 아니요 여름도 아니요 겨울도 아닐뿐더러, 아침도 아니고 한낮도 아니요 저녁도 아닌, 곧 금신이 제때를 만난 가을철인 데다 이제 막 닭이 울려는 새벽녘이니, 이 모든 것이 어찌 우연이기만 하겠는가.
페이지 : 166 "막북 행정록 / 8월 7일" 중에서

 

 지금의 느낌을 남기려 글을 쓰려니 물이 없어 술에 먹을 갈아 글을 쓴다니 너무 낭만적으로 느껴졌고 - 나만 그런가?

 

	"큰 술잔으로 가져 와!"  그러고는 큰 잔에다 술을 몽땅 따른 뒤, 단번에 주욱 들이켰다. 오랑캐들이 모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호오~ 탄식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기가 꺾인 기색이 역력하다....(중략)... 솔직히 이건 겁쟁이가 호기를 부린 짓이지 용기있는 행동은 아니다.
페이지 :  226 " 태학유관록 / 8월 11일" 중에서

  외국인들 (오랑캐) 사이에서 호방한 척 하려고 독한 술을 한번에 주욱 들이키는 행동을 해놓고 바로 저렇게 솔직히 털어놓기도 한다.

 

 당나라 때에는 토번이라 불리던, 서번 (지금의 티베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는 무척 반가웠다. 겉으로는 청황제가 생신축하 사절로 온 법왕을 크게 반가워하고 큰 예절로 답하는 것같지만, 사실은 평화정책으로 그들을 누루고 있었음을 박지원이 서술하는데 놀라울 따름이다. 결국 지금의 중국은 티벳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티베트의 라싸에 있는 포탈라궁의 축소판이라는 '보타종승지묘'의 사진이 삽입되어, 그 사진을 보면서 잠깐동안 유체이탈이 되어 티베트에 다녀온 듯한 기분을 맛봤다.

 

	천지간에는 별난 세상, 별난 사람이 다 있어서 이 도는 무명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에 따르면, 맑고 참되고 편안하고 즐거운 것이 생이라면, 때에 맞추어 돌아가는 것이 죽음이랍니다. 산다고 해서 특별히 즐거울 것이 없고, 죽는다고 해서 특별히 슬플 것도 없습니다. 계속 몸을 바꾸어 가며 환생하기 때문에 억만 겁을 겪어도 변함이 없지요. 벼슬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으며. 아는 것도 모르는 듯이 하고, 모르는 것도 다 깨달은 듯이 합니다. 전쟁과 살생을 좋아하지 않으며, 이 세상은 한낱 꿈으로, 사물은 헛되고 망령된 것으로, 언어는 거짓된 것으로, 고정된 것들은 허탄한 것으로,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걸림돌로 간주합니다. 부처도 아니고 선도 아니며 생각도 없고 걱정도 없으니, 이야말로 천지간의 별세계이자 별종의 학문인 셈입니다.
페이지 : 266 "태학유관록 / 황교에 대한 득별 보고서"

 

 옮길 내용은 훨~씬~ 많으나 이정도로 마무리 하련다. 황교한 티베트 불교를 말하는 건데 어찌나 고개를 주억거리게 만들던지.

 억압하는 중국에 대항하기 위해 분신을 자처하는 그들이 생각나서 한참동안 먹먹했다.

 

 <호질>, <허생전> 같은 이야기는 물론 머문 곳에서 전해지는 여러 이야기 (백이 숙제 이야기등)와 그곳의 문물과 구경한 건축물등 (북경등)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선 그의 상상력과 관찰력, 문장이 기이함과 예리함과 솔직함이 어우려져 그저 감탄할 뿐이다.

 

	만일 달 속에도 세계가 있다면, 오늘 이 밤에 어떤 두 명의 달 세계 사람이 난간에 기대어 지구를 바라보면서 땅빛의 차고 기우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지 그 누가 알겠습니까.
페이지 : 277 "태학유관록 / 8월 13일" 중에서

 

	만물은 그 자체로는 빛을 내지 못하니 본체는 어둡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예컨데, 어두운 밤에 거울을 들여다보면 목석처럼 아무것도 비치지 않지요. 이는 비록 거울이 비추는 성질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스스로 빛을 내지는 못함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햇빛을 빌린 연후에야 빛을 내기 때문에 그 반사하는 곳에 그림자가 생깁니다. 물과 밝음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저 땅덩어리 밖으로 바다가 둘러있는 건 비유하자면 커다란 유리거울과 같습니다. 만일 달나라에서 이 땅을 바라본다면 우리와 마찬가지로 상현이니 하현이니 보름이니, 그믐이니 초하루니 하는 현상이 있겠지요......(중략)...제가 달 속의 세계라고 말할 때, 거기에 정말로 하나의 세계가 있다는 건 아닙니다. 땅의 빛을 설명하기 위해 달 속의 세계를 임시로 끌어왔을 뿐이지요. 달의 위치에서 이 땅을 바라본다면 이 땅 위에서 저 달의 밝음을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페이지 : 305 "태학유관록 / 왕민호와 나눈 말들" 중에서

 그런데 수 많은 이야기 중에서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부분은 '곡정필담'이라며 왕민호라는 중국인과 필담을 나누는 부분이다. 달을 바라보며 하는 말을 보니 지구가 둥글고 공전과 자전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설명하는데 어찌나 예술적이신지.

 그리스인들이 오로지 관찰만으로 만물을 꿰뚫고 설명하려한 것(철학)에 감탄을 했는데, 박지원의 말과 글을 읽으며 그 때와 같은 감탄을 했다.

 

	비록 요술을 잘하는 자가 있더라도 소경은 눈속임하기가 어려울 테니, 눈이란 과연 믿을 만한 것일까요.
페이지 : 331 "태학유관록 /환타지아" 중에서

 

 엄청 줄이고 줄였는데 독후감을 너무 길게 쓰고야 말았다.

 

 작년 보다는 덜 추웠지만 그래도 겨울이었다. 그 겨울밤을, 한여름 여행기를 읽으며 뛰쳐나가고 싶은 욕망을 누르느라 무척 힘이 들었지만 너무나도 즐거웠던 한달이다.

 

 책 한권을 아껴가며 한달동안 읽는 경험도 처음이다. 급한 성질에 후다닥 읽거나 혹은 중도에 포기하는게 나였는데 이번엔

어려웠기에 쉽게 읽지 못했고 너무 즐거워서 중도에 그만 둘 수 없었다.

 

 그를 따라가며 많은 곳을 볼 수 있어서 눈이 즐거웠고, 그 속에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어 귀가 즐거웠다.

 

 덤으로 나를 뒤돌아보고 반성할 시간이 많이 주어져서 참으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