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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빨간 머리 앤이 너무 좋아.

그렇게 말하는 친구가 있었다. 몇 년전 그 친구의 생일에 이 아이를 선물로 보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난 이 아이를 그저 만화로만 만난적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난 같은 아이이니까 새로울 것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만나는 시간 내내 너무 재밌고 즐거웠다. 새처럼 지저귀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고 푸른 들판을 달리고 초록 지붕의 작은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밤 하늘의 별을 세는 모습이 보였다.

초록 지붕집에 살고 있는 커트버스 남매는 집안 일을 거들 남자 아이를 입양하려했는데, 여자아이인 빨간 머리 앤이 입양되고, 되돌려보내려다가 그냥 머물게 한다. 앤은 남매와 가족이 되고 학교도 잘 다니고 대학 입학시험에도 장학생으로 합격하여 그 마을을 떠나게 되었지만 심장마비로 매슈 커스버트가 죽고 마릴라 커트버스도 늙어 앞이 보이지 않게되자 포기하고 숙명적인 라이벌 길버트 블라이드의 양보로 마을의 학교 선생님으로 남는다. 앤은 길버트와 화해하고 좋은 친구로 남기로 하고 미래에 대한 새로운 꿈을 긍정적으로 꾸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도저히 나갈 수가 없어요. 밖에 나가면 저 나무와 꽃, 과수원, 시냇물과 친해져서 그것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지금도 힘든데, 더 힘들어지고 싶지 않아요. 저도 너무너무 나가고 싶어요. 다들 저를 부르고 있는 것만 같아요. '앤, 앤, 이리 와. 앤, 앤, 우린 친구가 필요해.' 하고 말예요. 하지만 나가지 않는 게 좋겠어요. 곧 헤어질 것들을 사랑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렇죠? 사랑하는 것들과 헤어지는 건 정말 힘들어요, 안 그래요? 여기에서 살 거라는 생각을 했을 때엔 몹시 기뻤어요. 사랑할 것들이 너무 많고 아무 것도 저를 방해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덧없는 그 꿈은 지나갔어요. 이제 제 운명에 따르겠어요. 다시금 운명에 따르지 않게될까 봐 두려워서 나가지 않으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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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자신이 선택되었고 가족이 생겼다며 좋아했으나 잘못된 것이란 걸 알게되고 앤은 절망하며 저런 이야기를 한다. 누군가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만 충실한 그녀의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가볍고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마릴라이지만 저 모습에 어찌 반하지 않을소냐. 매슈는 앤을 기차역에서 집까지 데리고 오면서 이미 그녀의 매력에 푹 빠졌으니 마릴라만 마음을 고쳐먹는다면 앤이 그 집의 가족이 되는건 문제가 아녔다.

쉴 새 없이 지저귀는 그녀가 귀찮게 혹은 시끄럽다고 생각할 사람도 많겠지만, 세상을 예쁘고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앤의 모습에서 잃어버린 어릴적 내 모습을 보는 듯 하니 -내가 그렇게 사랑스러운 아이였다는 말이 아녀 - 감정이입이 너무 잘 되어 읽는 내내 너무 즐거웠다.

퀸스를 졸업할 때에 저의 미래가 제 앞에 곧게 뻗어 있었어요. 그 길을 따라가면 많은 이정표를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죠. 이제는 그 길에 모퉁이가 생겼어요. 그 모퉁이 길에 무엇이 있을지는 저도 몰라요. 하지만 가장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을 거예요. 모퉁이 길은 그 나름대로 매력이 있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그 모퉁이를 돌아서면 어떨지 궁금해요. 어떤 초록빛 영예와 각양 각색의 빛과 그늘이 있을지, 어떤 새로운 풍경이 있을지, 어떤 새로운 아름다움이 있을지, 어떤 모퉁이와 언덕과 계곡이 펼쳐져 있을지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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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라의 건강문제로 대학진학을 포기하면서 마릴라를 안심시키며 하는 말이다. 닥친 상황을 탓하거나 슬퍼하는 대신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꿈으로 바꾼다. 이건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닌듯 하다. 타고난 천성이라고나할까.

읽는 내내 즐거웠으나 읽은지 한참이 지났기에 그 즐거움을 제대로 옮기기 힘들다. 하지만 시간이 지났으나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건

초록색 지붕 집에 사는 새처럼 지저귀는 소녀의 모습과 그녀가 말한 '모퉁이 길'에 대한 말이다.

내용을 아는 이야기라도 책으로 만나면서 더 깊은 감동을 주는 경우가 많다. 글로 읽으면서 그 내용을 머릿속으로 장면과 인물들을 하나하나 만들고 간혹 그 인물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면서 그들과 더 깊게 만나는 즐거움. 아마도 그 즐거움 때문에 이렇게 책을 읽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요런딸하나있었으면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