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이 불면서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린다. 시간은 어김없이 흐른다.

이래저래 시적인 생각에 빠져들고 있지만 아직은 손에 들고 있는 우리나라 근대소설을 읽고 있다. 아직은 소설의 시간이 이어진다.

 

수업을 들으며 염상섭의 <만세전>의 제목을 여러번 들었다. 그리고 수업을 들으며 꼭 읽고 싶었던 "강경애"작가의 글이 실렸다.

그래서 더 미룰 수가 없었다. 정말 이러다가 이 책의 시리즈 40여권을 죄다 읽게 될지도 모르겠다라는 걱정이 든다. 하여간

 

이 책은 염상섭의 <두 파산>과 <만세전>, 강경애의 <원고료 이백 원>이 실려 있는데, 우선

<두 파산>은 돈 때문에 일본 유학을 한 두 여성의 처지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여준다. 주인공 정례 모친은 점점 돈을 잃으며 물질적인 파산을 겪에 되고, 김옥임은 물욕에 빠져 정신적인 파산을 겪는 이야기를 하는데,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정례 모친과 같은 물질적인 경제적 파산보다 김옥임 같은 정신적인 파산이 더 위험하다는 것인데 그 시절이나 지금 현대사회나 별 차이없는 모습이 씁쓸하면서도 정확하고 냉철히 비판하고 있음에 놀랐다.

 

<만세전>은 제목만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뜻인가 했었는데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 그러니까 만세운동을 말하는 것이고

내용은 주인공인 이인화가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부인의 위독소식에 일본 유학중 시험도 미루고

일본에서 부산으로 배를타고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 본가로 가는 도중의 일과

부인이 죽은 뒤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면서의 이야기를 주인공의 심리 변화를 따라 풀고 있다.

 

	그러나 자기가 저편보다는 낫다, 한 손 접는다고 생각할 때에 느끼는 자랑과 기쁨이, 자기를 행복하게 하고 향상케 함보다는 저편보다 못하다, 감 잡힌다고 생각할 때에 일어나는 굴욕과 분개가 주는 불행과 고통과 저상이 겁이나 큰 것이다. 더구나 자존심이 강한 사람에게 대하여는, 보통 사람보다도 열 곱, 스무 곱, 백 곱이나 큰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 우열감이 단순한 개인과 개인과의 관계를 벗어나서 집단적 배경이 있을 때에는, 순전한 적대심으로 변하는 동시에, 좁고 깊게 사람의 마음속에 파고들어 앉아서, 혹은 노골적으로 폭발되기도 하고 혹은 은근히 일종의 세력을 기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도 다행한 일은 자존심이 많고 의지가 강한 사람일수록 그 굴욕과 비분으로 말미암아 받는 바 불행과 고통과 저상이, 도리어 반동적으로 새로운 광명의 길로 향하여 용약하게 하는 활력소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란 얼마나 강한지 의문이다. 약하기 때문에 잘난 체도 해 보고, 약한 죄로 남을 미워도 해 보고, 웃지 않을 때에 웃어도 보며, 울지 않아도 좋을 것을 울고야 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나 자신까지를 믿을 수가 없다.
페이지 : 108 "만세전" 중에서

수업중에 간단히 내용만을 추려 들었을 때는 그닥 읽고 싶지 않았고 대략 어떤 분위기인지 알것만 같았는데

지레짐작만 하고 읽기 않았다면 무척 후회를 했을터이다.

겉으로만 흐르는 내용을 보면 일본 유학을 하는 문학 전공생인 이인화는, 부인의 죽음을 앞두고 조선에 들어가면서

끊임없이 다른 여자 - 술집, 공창, 옛날 잠시 연을 두었던 - 에 대한 생각과 치근거림이 나오고

그렇다고 딱히 어떠한 주관이 제대로 서 있지도 않으면서 울컥 조선인을 무시하는 일본인에 대한 분개가 나오지만

정작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무기력한 모습만 보이기에 별 생각이 없는 약간 비겁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다 읽고 보니 한 개인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단체에 대한 무기력함으로 스스로를 비웃고 끊임없이 자기비판을 하는

많은 생각으로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가련한 사람이었다.  언뜻 내용을 들었을 때는 부인의 죽음을 앞두고도 딴 여자에게 눈을 돌리는 파렴치에 가까운 돈많은 일본 유학이나 하는 놈팽이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오해를 하다니.

 

다른 식솔을 구한다는 핑계로 한참 어린 여자를 첩으로 들이는 사촌형이나

배운 것도 없이 일본인처럼 머리를 자르면 오히려 일본말을 못하는 것이 들통나서 더 귀찮다며 무시를 당해도 그냥 상투를 자르지 않는다는 갓을 파는 상인을 만날때나

부인의 죽음을 앞두고 있는 그가 갖고 있는 우리나라의 매장 풍습에 대한 생각이나

자신에게 붙어서 돈을 뜯어내려는 여러 여자는 물론, 잠시 들른 술집의 여자도

조선인 어미 보다는 일본인 아비를 찾아 가겠다며 조선인은 금을 주어도 싫다라는 여자를 만나면서

시시껄렁한 농담을 호기롭게 부리다가도 자신이 그러한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 자괴섞인 반성과 울컥하며 질러대는 모습이

교차적이고 반복적으로 보이는데, 그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갔고

그는 자신의 무기력을 푸는 방법을 자신을 괴롭히는 것으로 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보니 부산으로 가는 배안의 목욕탕에서 조선 사람들을 속여 노동자로 팔아 넘기는 일본사람은 물론

수시로 검문을 해대고 짐을 뒤지는 일본 헌병을 만나면서 그가 굴욕감에 분노할 때는 나도 눈물이 날 뻔했다.

 

	'이 방 안부터 여부없는 공동묘지다. 공동묘지에 있으니까 공동묘지에 들어가기를 싫어하는 것이다. 구더기가 득시글득시글하는 무덤 속이다. 모두가 구더기다. 너도 구더기, 나도 구더기다. 그 속에서도 진화론적 모든 조건은한 초 동안도 거르지 않고 진행되겠지! 생존 경쟁이 있고 자연 도태가 있고 네가 잘났느니 내가 잘났느니 하고 으르렁댈 것이다. 그러나 조만간 구더기의 낱낱이 해체가 되어서 원소가 되고 흙이 되어서 내 입으로 들어가고 네 코로 들어갔다가, 네나 내나 거꾸러지면 미구에 또 구더기가 되어서 원고가 되거나 흙이 될 것이다. 에이! 뒈져라! 움도 싹도 없어져 버려라! 망할 대로 망해 버려라! 사태가 나든지 망해 버리든지 양단간에 끝장이 나고 보면 그중에서 혹은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나은 놈이 생길지도 모를 것이다.'
페이지 : 180 "만세전" 중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 앉에서 그는 울부짖지만 그러한 울부짖음도 속으로 할 수 밖에 없다.

 

	"글쎄,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소마는, 이제는 피차에 냉정히 생각을 해 가지고 제각기 제 분수대로 제 길을 걸어 나가야 할 때가 되었게씾요. 남에게 동정을 하고 어쩌고 하기 전에 위선 마음을 가라 앉혀 가지고 내성을 할 때가 돌아와야 하겠지요. 을라나 형님이나 내나 우리는 원심적 생활을 해 왔다고 하겠으니까 인제는 구심적 생활을 시작하여야 하겠지요, 어떻든 무엇보다도 냉정하고 심각하게 생각을 해서 내적 생활의 방향 전환에 노력하는 것이 자기 생활을 스스로 지도하는 데에 제일 착수점이겠지요......."
페이지 : 222 "만세전" 중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고르고 골랐는데, 어째 적고 보니 그가 자신의 심정을 너무 서술한 부분만 옮긴 듯 하다. 하여간 읽으면서 한 사람의 속 마음을 제대로 만났다. 그리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 속에 이렇게 다른 모습의 사람이 있을 수도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아주 반가운 만남이었다.

 

읽으면서 이인성작가의 소설들이 계속 떠올랐다. 순간 주인공 "이인화"를 "이인성"으로 착각하며 읽기도 했다.

아마도 이 책을 읽기 직전에 이인성 작가의 글을 읽었기에 더 헷갈렸을 수도 있고. 읽으면서 비슷하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이인성 작가의 소설은 대체로 자신이 주인공으로 독백식으로 풀고 있는데

이인화가 소설을 쓴다면 이인성 작가와 같은 소설을 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만세전>에 대한 생각은 이쯤에서 접고.

 

강경애의 <원고료 이백 원>은 정말 짧은데도 힘차고 시원하면서도 솔직한 내용이 신선함을 넘어 충격을 받았다.

 

	K야, 너는 지금 상급 학교에 가게 되지 못한다고 혹은 스위이트호움을 이루게 되지 못한다고 비관하느냐? 너의 그러한 비관이야말로 얼마나 값없는 비관인가를 눈 감고 가만히 생각해 보아라. 네가 만일 어떠한 기회로 잠시 동안 너의 이상하는 바가 실현될지 모르나 그러나 그것은 잠깐 동안이고 너는 또다시 대중과 같은 그러한 처지에 서게 될 터이니 너는 그때에는 그만 자살하려느냐.  K야, 너는 책상 위에서 배운 그 지식은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 이제야말로 실펀으로 말미암아 참된 지식을 얻어야 할 때이다. 그리하여 너는 오직 너의 사회적 가치를 향상시킴에 힘써야 한다. 이 사회적 가치를 떠난 그야말로 교환 가치를 향상시킴에만 몰둘한다면 너는 낙오자요, 퇴폐자이다. 이것은 결코 너를 상품시 혹은 물건시하는 데서 하는 말이 아니요, 사람이란 인격상 취하는 방면도 이러한 두 방면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자 함이다.
페이지 : 251 "원고료 이백 원" 중에서

여동생 K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이 글은,

가난 때문에 급우의 붓과 종이를 훔쳐 벌을 받는 등의 굴욕적이고 뼈져린 어린 학창 시적을 보낸 이야기와

간도에서 가난속에 살고 있던 어느 날, 원고료 이백원의 쓰임을 두고 남편과의 갈등을 겪은 이야기를 솔직히 말하고 있다.

그 이백원을 헐벗다 시피한 자신과 남편을 위해 쓰고 싶었으나 가난한 동지를 위해 쓰자는 남편의 말을 듣고선

허영심이 되살아난 자신이 실은 입으로만 민중을 위하는 삶을 산다고 했던 것을 자아비판을 하고 있다.

아주 짧은 글인데 어째 받아 적고 싶은 내용이 이리도 많은지.

 

내일 이 책을 반납 해야함을 깜박해서 급한 마음에 후다닥 독후감을 적는다.

 

시간이 좀 더 있었더라면 더 많은 내용을 적어두었을터라 아쉬우면서도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나라 근대 소설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이 참으로 많다.

느낀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쓸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아직은 이렇게 열심히 읽을 때라고 생각하며 줄창 읽어대고 있다.

하지만 2학기 중간 과제물을 위해 읽어야 할 책들이 선정되었으니

한동안은 "듣보잡" 책에 빠져 허우적 대야 하기에 이 즐거움도 잠시 접어야 할듯 하다.

 

물론 정신 못차리고 과제 마감날까지 필독서는 안읽고 이 40여권 시리즈를 끼고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꼬리에꼬리를물게하는이중독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