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여우     너를 따라 사막의 사막 속으로 도망쳐버릴 걸 그랬어 모래 위에 난 너의 발자국을 쫓아 영원히 사라져버릴 걸 그랬어 서울로 돌아와도 아무도 나를 찾는 이 없는데 이별할 뒤에도 또 이별할 일만 남아 있는데 너를 따라가 맛있는 너의 먹잇감이나 되어줄 걸 그랬어 추워 떨며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나에게 네가 살며시 웃으면서 다가왔을 때 나는 왜 너를 멀리 쫓아버리고 말았는지 사막의 그 먼 밤길을 오직 내가 보고 싶어 찾아온 줄도 모르고 굴속에 재워둔 귀여운 새끼들을 보여주고 싶어서 자꾸 날 따라오라고 손짓하는 줄도 모르고 나는 왜 날카로운 플래시의 불빛을 너의 얼굴에 계속 비추기만 했는지 네가 막 세벽 지평선 위로 떠오른 노란 오렌지 조각 같은 반달을 내 머리맡에 데리고 왔을 때에도 네가 사막의 별들을 모두 모래 위에 내려앉게 하고 희 조약돌 같은 북두칠성을 내 손에 쥐여주었을 때에도 나는 왜 나를 버리고 너를 따라가지 못했는지 그리운 사막여우 네가 나 대신 물고 간 내 가난한 신발 한 짝은 잘 있는지 지금도 네 신발을 물고 힐끔힐끔 뒤돌아보며 사막의 사막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고 있는지
페이지 : 70 "사막여우" 전문

 

 

웃으며 다가왔지만 못본체 했고 쫓아 보냈던 일이 생각났다.

그도 그렇게 먼 길을 왔더란걸 몰랐다.

함께 보낸 시간들이 있음을 애써 잊고 있었다.

이별할 일만 남았음을 알기에 영악하게 피했다 생각했다.

이젠 익숙하기에 무심히 넘길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기억만으로도 아직 아프다.

 

친구의 결혼식을 다녀오는 길을 이 시집이 함께 했다.

 

아름다운 결혼식에서 난 오래간만에 그리움을 꺼냈다. 어울리지 않게 말이다.

버렸다고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녔나보다.

축가가 울리고 화려한 불빛이 식장에 가득했지만 난 계속 사막에 서 있었다.

그저 홀로 남았다.

 

	누더기       당신도 속초 바닷가를 혼자 헤맨 적이 있을 것이다 바다로 가지 않고 노천횟집 지붕 위를 맴도는 갈매기들과 하염없이 놀다가 저녁이 찾아오기도 전에 여관에 들어 벽에 옷을 걸어놓은 적이 있을 것이다 잠은 이루지 못하고 휴대폰은 꺼놓고 우두커니 벽에 걸어놓은 옷을 한없이 바라본 적이 있을 것이다 창 너머로 보이는 무인등대의 연분홍 불빛이 되어 한번쯤 오징어잡이배를 뜨겁게 껴안아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먼동이 트고 설악이 걸어와 똑똑 여관의 창을 두드릴 때 당신도 설악의 품에 안겨 어깨를 들썩이며 울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버지같이 묵묵히 등을 쓸어주는 설악의 말 없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은 바다가 보이는 여관방에 누더기 한 벌 걸어놓은 일이라고 걸어놓은 누더기 한 벌 바라보는 일이라고
페이지 : 50 "누더기" 전문

 

 

- 그런 사람을 이제야 만났습니다.

 

그녀의 그 말이 아직도 귓가에 울린다.

마흔넘은 나이에 아직도 멋진 몸매와 미모를 자랑하던 그녀에게 어울릴 남자는 세상에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남자가 있었고 그 남자는 그녀를 놓치지 않았고 그녀도 그를 알아봤다.

그리움이 아닌 기다림이 그녀와 그를 하나로 묶어 주었나보다.

 

 

	그러나 나는 너와 함께 가지 않는다 거듭거듭 말하지만 평생 나는 너의 것이 아니다 나는 나 혼자 갈 뿐 너는 너 혼자 갈 뿐
페이지 : 49 "여행가방" 중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꽉 찬 사람들 틈에 서서 오면서 이 구절을 여러번 반복해 읽었다.

그러면서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그런가 보다...하면서

난 기다림이 아닌 그리움만 키우고 있기에

그러면서 이렇게 나는 나이고 너는 너 일뿐이라는 생각으로

결국엔 모두 다 혼자 갈 뿐이라고

결국엔 이별만 남았다고 생각해서 그런거라고.

 

	나무에 쓴 시     봄이 오면 사람 밑에 앉아 있지 않고 나무 밑에 앉아 있겠어요 종일토록 봄비가 오다가 그치지 않으면 사람 밑에 서서 비를 맞지 않고 나무 밑에 서서 비를 맞겠어요 잘라버린 귀를 다시 찾아 붙이고 나무에 내리는 빗소리에 인생을 빼앗기고 말겠어요 쓸쓸히 비를 맞고 가는 죽은 벗들을 길에서 만나면 일일이 반갑게 악수를 하고 밤새도록 우산을 함께 쓰고 가겠어요 비가 그치고 햇살이 눈부셔도 더이상 날아가는 화살을 잡으려 하지 않겠어요 작은 산을 향해 걸어가는 큰 산을 묵묵히 따라가겠어요
페이지 : 90 "나무에 쓴 시" 전문

 

만나고 싶다해서 만날 수 있는게 아닌 것처럼

잊고 싶다고 해서 잊을 수 있는게 아닌 것처럼

내 의지로 할 수 있는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내가 할 수 있는건 그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오는 것에 가는 것에 의미두지 않으면서 모든 것은 그저

잠시 스쳐가는 것이라는 것만 잊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낙죽     결국은 벌겋게 단 인두를 들고 낙죽(烙竹)을 놓는 일이지 한때는 산과 산을 뛰어넘는 사슴의 발자국을 남기는 줄 알았으나 한때는 맑은 시냇물의 애무를 견디다 못해 그만 사정해버리는 젊은 바위가 되는 줄 알았으나 결국은 한순간 숨을 멈추고 마른 대나무에 낙을 놓는 일이지 남을 사랑한다는 것 아니 나를 사랑한다는 것 남을 용서한다는 것 아니 나를 용서한다는 것 모두 낙죽한 새 한 마리 하늘로 날려보내고 물이나 한잔 마시는 일이지 숯불에 벌겋게 평생을 달군 날카로운 인두로 아직도 지져야 할 가슴이 남아 있다면 아직도 지져버려야 할 상처가 남아 있다면
페이지 : 36 "낙죽" 전문

 

 

오늘과 어울리는 시집을 들고 길을 나섰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아쉽다.

 

이런저런 생각과 이런저런 마음이 얽힌다.

좋은 마음과 쓸쓸한 마음이 섞인다.

 

그리움이 아닌 기다림으로 인연을 만든 그녀의 용기와 현명함 때문에

오늘은 유독 내가 초라하게 느껴진다.

 

 

 

 

 

마흔이넘어도미모는숨길수없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