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가지는 힘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것보다 더욱 크다. 그것이 마음에 들었든, 들지 않았든 상관 없이 이름은 부르는 사람에게도, 불리는 사람에게도 모두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모두 이름을 가지고 있고 누군가가 "야, 거기, 너, 저기, 있잖아, 어이." 하고 부르기 보다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길 바라고 있다.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첼리스트 정희연씨가 솔리스트에 오르기 전에 강마에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며 이름이 예쁘다고까지 말해주었다. 덕분에 정희연씨는 솔로 연주를 훌륭히 해냈고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일어섰다. 누군가에게 이름이 불린다는 것은 강한 울림을 가져다준다. 오죽하면 김춘수 시인은 자신의 시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겠는가.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을 정도로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그 사람의 존재를 확인시켜주고 인정해주는 것과 같다. 그렇게 중요한 것이 이름인데 여기, 제 이름을 버리고 다른 이의 이름으로 사람들 앞에 서야하는 사연을 가진 아이가 있다.

 

 

빚을 지고 야반도주 하듯 엄마와 함께 떠나온 캄보디아. 하지만 그곳에서의 삶도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았다. 열일곱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꿈만 꾸어도 부족할 시간에 수아는 자신의 학비와 빚쟁이들의 방문, 월세와 온갖 세금, 학비를 신경쓰고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아이는 돈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고 어른들은 종종 말하곤 한다. 너희 때는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것도 집안 사정에 따라 다르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어른들은 알고 있을까? 수아에게 돈 걱정은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매 시, 매 분, 매 초마다 하는 진학걱정과 같은 수준으로. 아니 그보다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는 수준으로 수아를 괴롭힌다. 빚쟁이들이 언제 찾아올 지 모른다는 불안함. 그 불안함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수아와 술병이 났다며 가이드 미팅을 나가지 않고 자신의 딸에게 "네가 대신 갈래?"라고 말하는 철부지 엄마의 모습이 왠지 지금 내 상황에 오버레이된다. 그래서일까? 수아가 자신의 엄마 대신 가이드 일을 떠맡게 되었을 때 느꼈을 배신감과 속에서 끓어 오르는 화는 오롯이 내게도 전이되어 증오심을 불태우게 되었다. 나는 도무지 김지옥 여사를 이해 할 수가 없다. 생계를 책임져야 할 보호자의 입장에 있으면서 어떻게 딸아이가 모아둔 오백달러를 들고 내뺄수가 있는지. 그 무책임함이란 아빠란 존재를 이미 상실한 수아에게 있어 또 다른 상처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허겁지겁 내 방으로 돌아와 트렁크를 열었다. 태국에서 가져온 짐 중에서 옷과 책을 빼고 중요한 물건들은 죄다 그곳에 넣어 둔다는 건 엄마도 잘 알고 있었다. 트렁크 중간에 걸린 그물망 지퍼를 열었다. 여권과 노트, 그리고 중학교 친구들의 사진이 정리돼 있는 사진첩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마지막 장에 꽂힌 아빠 사진을 떼서 그 뒤를 확인하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엄마는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내가 아빠 사진 뒤에다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모은 오백달러를 숨겨 둔 사실을…….                    - p. 37

 

지옥 대신 자리를 매꿔줄 가이드가 없어서 미팅에 나가지 않는다면 여행사에 돈을 물어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쿤라의 말에 수아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결국 그 뒷처리는 수아의 몫이 되었다. 수아만 버리고 떠나간 엄마를 씹어대며 욕할 틈도 없이 그녀는 그렇게 생활전선에 뛰어 들어야만 했다. 한국에 돌아갈 오백달러를 다시 모으기 위해서라도. 엄마의 부재로 비어버린 자리에 수아가 들어가 자신의 이름 대신 엄마의 이름인 '김지옥'으로 가이드 미팅에 나가 가이드를 해야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휘청거리고 삐걱거리고, 실수도 잦았지만 수아는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자신에게 배정된 한국인 여행자들을 훌륭히 인솔해야 해서 머리가 터질 지경인데 또 한 가지 악재가 터지고 말았다. 바로 현지인 가이드인 쿤라가 맹장으로 병원에 입원한 것이었다. 새로 가이드를 배정 받을 수도 있었지만 자신이 쿤라 대신 하겠다며 나서는 쩜빠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수아는 완강히 거절하지 못하고 으르렁 거리면서도 쩜빠를 데려간다. 잡음도 많고 태클도 걸리는 제법 조용할 날 없는 가이드였지만 4박 5일 동안 두 사람은 함께 티격태격 하면서도 별 탈 없이 가이드를 훌륭하게 해낸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지만 쩜빠에 대해 알아가면 알아 갈 수록, 이해하게 되면 이해하게 될 수록 수아의 각오는 뜨거운 열기에 녹아내리는 초콜릿처럼 흐늘거리기 시작한다.

 

아빠와의 추억이 가장 진하게 녹아 있는 캄보디아. 가이드 활동을 하며 수아는 대부분 아빠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관광객들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여행지를 돌아다닐 수록 아빠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커져만 갔고, 캄보디아에서 빛바랜 아빠와의 추억을 자꾸만 꺼내며 기억하고 슬퍼했을 엄마를 동정하기도 했었다. 수아는 예전처럼 엄마와 아빠, 셋이서 함께 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아빠가 엄마와 이혼했다고 믿고 있었다. 자신과 엄마를 버리고 간 것이라고. 그 믿음은 4박 5일의 가이드 활동이 완전히 끝맺음하는 하루 전 날 깨지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집으로 찾아온 오봉 아저씨네가 집에 부재중인 김지옥 여사를 찾았을 때 벌어졌다. 알고보니 그 두 사람은 엄마가 돈을 빌렸으나 갚지 않아 쫓아온 빚쟁이였던 것. 빚쟁이가 관광객들 틈에 끼어 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나 수아는 빚은 꼭 갚겠다며 아빠에게만은 찾아가지 말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오히려 의문을 표하는 것은 오봉 아저씨네였다. 아빠가 살아있다고 믿는 수아에게 죽은 사람에게 자신이 뭘 어떻게 할 것 같냐고 말했다. 충격을 받은 것은 수아였다. 쩜빠가 수아를 진정시키려 밖으로 불러내려 했지만 수아는 쩜빠의 손길을 뿌리쳤다. 오봉 아저씨는 수아의 반응에 당혹스러워했다. 한국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아빠가 죽고 수아는 그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말을 쩜빠에게서 들은 뒤에야 그녀는 자신이 왜 엄마를 미워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왜 하고 많은 나라 중에 캄보디아로 와야만 했는지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 소설은 청소년소설, 즉 성장소설이지만 이렇다 할 교훈이 있다고 보기엔 어렵다. 교시적 성격이 강하다기 보다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가는 것처럼 소설의 마지막까지 순식간에 읽어 나갈 수 있다는 점이 <내 이름은 망고>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 책에는 총 세가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하나는 김지옥여사와 수아의 이야기고, 또 하나는 수아와 쩜빠, 삼콜 할배와 쏙천이 어울려가는 이야기며, 마지막 하나는 수아가 한국인 여행자 6명을 데리고 캄보디아의 여행지를 투어하는 이야기다. 이 세가지 이야기는 갈라 놓으면 서로 다른 이야기지만 겹쳐 놓으면 빈 자리에 맞춤하게 들어가 훌륭한 그림을 완성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여행기를 읽고 있는 기분도 들었지만 수아와 가정사가 판박이처럼 닮은 짬빠의 등장으로 얼추 이야기가 수평을 이루기 시작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가정사까지 수아를 쏙 빼닮아 있는 쩜빠는 그녀에게 있어서 커다란 버팀몫과 다름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녀에게 큰 힘이 되어주며 항상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던 것도 쩜빠였다. 특히 수아가 '비밀'을 털어 놓으려 결심했을 때 눈빛으로 응원했던 사람도 다름 아닌 쩜빠다.

 

관광객들이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출국장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수아는 지금껏 숨길 수 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조마조마하며 불편해야 했던 작은 사실 하나를 털어 놓는다. 그것은 딱 한 마디로 충분했다. 닷새 전에 해야만 했던 말. "섭섭하이. 반갑습니다. 저는 이, 수, 아라고 합니다."라는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 수아가 얼마나 용기를 짜냈을지는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지난 5일 동안 자신의 이름이 아닌 '김지옥'이라는 이름으로 대신 살며 가이드를 해야만 했던 수아. 그렇기에 모두가 자신을 '지아학생', '가이드님'이라 불러도 마음 편히 웃을 수 없었고, 언제 정체가 탄로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쩜빠와 살콤 할배의 오지랖에 촉을 곤두세워가며 경계를 해야만 했었다. 하지만 마지막이 되어서야 그녀는 엄마의 이름이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사람들 앞에 설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현실에서 도망치려고만 한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기까지, 자신의 이름을 밝힐 수 있게 된데까지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걸렸고, 많은 상처를 안게 되었다. 허나 그녀의 용기 있는 고백에 사람들은 질책과 힐난보다는 따뜻한 박수를 선물해 주었다.

 

심장을 두드리는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두들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쩜빠 역시 내가 이렇게 솔직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빛내며 누구보다 세게 손뼉을 쳤다. 이 정도의 반응이라면, 죽을 만큼 용기를 내길 잘한 것 같다. 공항 청사에 도착해 짐을 내리는 사이, 나는 잠시 일행에게서 떨어져 한갓진 의자에 앉아 숨을 골랐다. 지금이라도 아빠에게 전화를 걸면 내 이야기를 들어줄 것만 같은데…… 그게 현실이 아니란다. 어쩌면 오봉 아저씨와 쩜빠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차라리 아빠가 엄마와 나를 깡그리 잊고 새 출발을 했다고 믿고 싶다.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믿음이 완전한 상실감보다는 나을 테니까.                    - p. 241

 

수아가 제 이름을 밝힌 것이 황석영의 <삼포가는길>에서 백화가 떠나가는 영달의 뒤에 대고 "제 이름은 이점례예요."라며 외쳤던 것과 다를게 무에있을까?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던 엄마도 돌아 왔고, 서로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었던 쩜빠와도 마음을 열고 이야기 할 수 있게 된 수아. 어설프고 고됐지만 수아에게 있어 입사의 과정이 된 가이드 활동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쩜빠와 함께 웃음을 주고 받는 것으로. 아빠와의 추억이 담긴 바이욘 사원에서 쩜빠와 압사라 춤을 추는 것으로. 캄보디아에 있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좋아하게 되는 것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