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 앞에는 할머니의 여행가방이 여전히 굳게 닫힌 채 놓여 있다. 크지는 않지만 한두 주 여행에 필요한 짐을 싸기에는 넉넉하다.

가방은 주인인 할머니를 닮아 우아함과 실용성 사이에서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당당히 새겨진 ‘그로브 트로터’ 라는 상표는 가방의 주인이 얼마나 여행을 좋아했는지를 보여준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해방된 뒤 새로운 자유를 찾은 할머니는… 새로운 모험의 세계를 발견하셨다. 하지만 이 여행 가방은 아직 새것이다. 마지막 여행을 위해 할머니는 이 가방을 아껴두셨다.

장례식을 치르고 사랑하는 이들을 보듬어주기에 짧지도 길지도 않았던 며칠 동안, 어머니는 할머니의 시신에 온기도 가시기 전 할머니의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모르게 할머니의 방에 숨어 침대에 가방을 올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텅 빈 가방을 보니 내 가슴도 텅 비었다. 할머니가 집과 벽과 책과 서랍 곳곳에 남겨놓은 사랑과, 가족과 웃음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가방 속에 간직했다.

이 여행가방은 할머니와 나, 두 사람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나를 위한 할머니의 추억과 할머니를 위한 나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일 년이 지났다. 그 동안 한 번도 가방을 연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할머니가 보낸 편지와 할머니와 찍은 사진들을 넣기 위해 살짝 가방을 열어보았다. 가방을 안고 잠드는 날이 많았다.

점점 가방을 여는 일이 두려워졌다. 추억은 우리와 함께 변화하고 우리를 통해 변화하지만 사물은 그렇지 않다. 가방 안에 든 물건들마저 할머니를 버릴 것만 같았다.

가방은 내게 할머니를 되돌려주었다. 그러나 가방이 너무 빨리 열리면 할머니를 다시 잃을 것만 같아 두려웠다. 할머니의 체취는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고, 편지는 퇴색되고, 옷에 남은 할머니의 굴곡은 희미해지리라.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산 자와 함께 살아가라고. 그리고 당부도 잊지 않으신다. 제정신이 아닌 것도 집안 내력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