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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길에서 어렴풋이 꿈을 꾸다 이동진의 영화풍경 ● 아일랜드 영화 〈원스〉는 더블린에 대한 나의 막연한 상상을 완전히 다른 온도와 색깔로 바꾸었다. 실연의 아픔을 거리에서 부르는 노래로 달래는 남자(글렌 한사드)와 가족의 생계를 힘겹게 책임져야 하는 체코 출신 여자(마르케타 이르글로바)의 만남을 다룬 이 작품에서 더블린은 거리마다 음악이 흘러넘치는 곳이었다.   〈원스〉를 보고 나니, 이제 더블린에서 무엇보다 찾아보고 싶은 풍경은 음악이 발을 떼고 걷고 뛰고 쉬는 모습이었다. 그 거리의 수많은 글렌 한사드들과 마르케타 이르글로바들은 어떻게 노래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한 해의 끝을 향해 시간이 아찔한 속도로 가속 페달을 밟던 어느 겨울날, 그 도시 더블린으로 갔다. 그러자 음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이 글의 소제목은 영화 〈원스〉에 삽입된 곡명들이다). 단 한 번의 사랑, 단 한 번의 삶_영화 [원스]의 아일랜드 더블린 당신이 결심했을 때When your mind’s made up   ‘월튼 숍’은 예상보다 규모가 컸다. 더블린 시청 옆 사우스 그레이트 조지스 스트리트에 있는 이 악기 판매점은 〈원스〉에서 두 남녀가 피아노와 기타를 치며 함께 노래했던 곳이었다. 카운터를 지나 넓어지는 매장의 입구에는 영국 록 밴드 버브The Verve의 《도시의 찬가Urban Hymns》나 트래비스Travis의 《굿 필링Good Feeling》 같은 유명 앨범들의 악보가 꽂혀 있었다. 그 뒤로는 기타와 드럼에서 피아노와 색소폰까지, 윤기가 흐르는 각양각색의 악기들이 언젠가 미래에 풀어낼 음악을 현재의 침묵으로 품고서 곳곳에 알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유난히 예쁘게 반짝이는 붉은 기타 하나를 바라보고 있자니, 독일 시인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의 4행시가 떠올랐다.   세상만물 속에는 노래가 잠들어 있네 만물은 계속 꿈을 꾸고 세상은 노래하기 시작하네 어서 주문을 알아맞혀라   천천히 흘러내리며Falling slowly 대목을 맞은 번화가 그래프튼 스트리트는 인파로 북적댔다. ‘해피 크리스마스’를 뜻하는 아일랜드어 ‘Nollaiz Shona Duit’이란 글자가 눈부신 네온사인으로 거리 초입을 장식한 가운데, 색색의 간판과 갖가지 조명들이 어우러져 겨울밤의 화려함을 한껏 과시했다. 〈원스〉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인상적으로 기억할 그래프튼 스트리트는 극중에서 끝까지 이름이 나오지 않는 주인공 남자가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던 거리였다.   연말이라 거리 곳곳에서 자선공연이 펼쳐졌다. 그래프튼 스트리트 북쪽에 세워놓은 대형 트리 앞에서는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시민 합창단이 노숙자들을 돕기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캐럴을 불렀다. 제대로 연습도 안 한 듯 열 명이 넘는 단원들이 화음도 넣지 못하고 가사까지 계속 훔쳐보며 불렀지만, 얼굴 표정만큼은 아주 밝고 화사했다. 서로를 곁눈질할 때마다 웃음을 터뜨리고, 노래가 끝날 때마다 자신들이 먼저 박수를 치며 흐뭇해하는 합창단을 보는 것은 실로 즐거운 일이었다.   그래프튼 스트리트에서는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행인들을 상대로 음악을 팔아 살아가는 가난한 뮤지션들의 일터이기도 한 이곳이 전세계에서 임대료가 여섯 번째로 비싼 호화 쇼핑가라는 역설 속에 음악과 돈, 꿈과 현실의 괴리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손님을 기다리는 관광용 인력거 기사와 부지런히 무료 일간지를 나눠주는 여자를 지나쳐 극중 주인공이 노래를 부르던 더니스 스토어 앞으로 갔다. 그 자리는 그래프튼 스트리트의 뮤지션들에게 최고의 명당이었다. 그 앞을 지나다닐 때마다 대학생 자선 중창단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백발의 할아버지로, 그리고 색소폰을 부는 아랍계 남자로, 음악을 들려주는 이가 계속 바뀌었다.   근처의 또다른 상점 앞에서도 한 청년이 어쿠스틱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하고 있었다. 한동안 서서 지켜보았지만, 양 손에 쇼핑백을 가득 거머쥐고서 바쁘게 걷는 수많은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그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거나 발길을 멈춰서는 사람은 없었다. 월튼 숍에서 악기를 구입한 지 기껏 2~3년쯤 된 것 같은 실력이라고 해야 할까. 기타 연주와 노랫소리는 너무나 작았고, 청년은 지나치게 수줍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나무판과 여섯 개의 현으로 이뤄진 작은 음악상자로부터 하나씩 튕겨져 나온 음들은 불안에 잠시 몸을 떨면서도 이윽고 리듬과 멜로디로 서로의 손을 맞잡고서 차가운 세상 속으로 천천히 흘러내리며 온기를 만들어냈다. 청년은 나직한 목소리로 기타를 뒷받침하며 자신이 생산해낸 음들에 대해 책임을 졌다.   예담 [길에서 어렴풋이 꿈을 꾸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