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에게서 받은 백만 원이 저주스러웠다. 지금 주연에게 이 돈은 전 재산이자 다음 달까지 주연을 먹여 살려야 하는 돈이었다. 아껴 쓰고 남은 돈을 저축해서 미래를 위해 남겨 두어야 할 돈이었다. ‘사고 싶은 물건을 살 수 없다는 건 너무 고통스러워!’

시큰거리는 발목을 주무르며 백화점 입구에 앉아 있던 주연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샤넬 제품으로 도배를 한 마네킹이 거만한 포즈로 주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가 지금처럼 불행했던 적이 있었어. 갖고 싶은 물건을 사지 못해서 죽고 싶었던 그때.’

더 이상 회사 생활에 비전이 없다고 판단한 주연은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공교롭게도 주연의 퇴직 시기와 맞물려 아빠마저 명예퇴직을 해버렸다. 프랑스 유학의 꿈은 고사하고 당장 다른 직장을 알아봐야 했지만 죽어도 다시는 취직하고 싶지 않았다. 취직한다고 해도 참아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도대체 지금까지 학교는 뭐 때문에 다녔고 공부는 왜 죽어라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연히 백화점에 갔다가 주연은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너무 불행해서 죽을 것 같았다. 취직하라는 부모님의 말 때문도, 유학을 갈 수 없다는 통보 때문만도 아니었다.

먼지 하나 없는 유리창 안에 진열된 샤넬 원피스를 입을 수 없게 된 현실 때문이었다. 그것은 가슴을 찢는 고통이었다. 그 옷을 갖지 못하면 당장 죽을 것 같았다. 저런 옷도 못 입어보고 사는 것은 살 가치도 없다고 느껴졌다. 훔쳐서라도 갖고 싶었다.

주연은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도, TV를 보고 있어도, 심지어 자려고 눈을 감아도 원피스의 환영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 옷을 입으면 주연의 칙칙한 인생도 달라질 것만 같았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운 주연은 다음 날 비장한 표정으로 매장을 찾아가 점원에게 말했다. “입어볼게요.” 입어볼 생각이었다. 입어보는 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입어보고 어울리지 않네 하며 포기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렸을 때 카드 영수증과 원피스가 담긴 쇼핑백이 그녀 손에 들려 있었다. ‘이걸 어쩌지? 엄마한테 뭐라고 하지?’

순간 주연의 머리에 무언가가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주연은 그 길로 동대문 종합시장에 가서 원단을 끊어다 똑같은 옷을 만들었다. 입기 위해서가 아니라 팔기 위해서였다. 인터넷에 원피스를 입은 사진을 올려놓았다. 옷은 순식간에 팔려 나갔고 주연은 샤넬 원피스를 환불하지 않아도 됐다. 그렇게 디바가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발목을 주무르던 주연은 원인 없는 자신감에 차서 벌떡 일어났다. 고작 백만 원을 아껴서 한 달에 10만 원씩 모은다고 해도 1년 모아봤자 120만 원! 그 돈으로 무슨 미래가 달라지고 무슨 부귀 영광을 얻는단 말인가?

‘이걸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미래도 없어!’

주연은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 점원에게 말했다.

“아까 입어봤던 옷 주세요.”

밤이 늦어서야 주연은 원피스를 사들고 마을에 돌아왔다. 광천댁이 주연을 보자 휘둥그레진 눈으로 말했다.

“어디 가 있었어! 하루 종일 홍회장님이 찾았어! 월세 때문은 아닌 거 같던데?”

그제야 주연은 공부방에서 과자 파티가 있다는 것을 깜빡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정신이 있는 게야? 없는 게여?”

노인은 주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버럭 고함을 질렀다.

“과자 파티를 한다고 해놓고 아이들을 기다리게 하면 어쩌자는 거야?”

노인은 이내 주연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