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라고 물러서면 여자라서 물먹는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 _《햄릿》 중에서       전 세계를 통틀어 여자와 관련된 가장 유명한 말을 꼽으라면 아마 셰익스피어의 희극 《햄릿》에 등장한 이 대사가 아닐까 싶다. 부친이 죽은 후 숙부와 결혼한 어머니를 향해 햄릿이 던진 이 말은, 본래는 ‘여자’를 통해 ‘인간’의 연약함을 일갈하는 뜻으로 쓰였다. 하지만 세간에서는 문자적인 의미로만 해석하여 ‘여자는 연약하다’는 편견을 공고히 하는 용도로 활용되곤 한다. ‘여자는 약하다’는 편견은 여성이 사회에서 당당히 서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장애물이다. 타고난 힘이 약한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여성이라는 점을 궂은일에 대한 ‘열외’의 이유로 삼아서도, 삼게 해서도 안 된다. 프로로, 나아가 리더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말이다. 2008년 5월 5일 월요일, 광진구에서 AI(조류인플루엔자)가 발병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성남시 모란시장에서 사서 구청 자연학습장에서 키우던 꿩과 닭들이 AI로 폐사했다는 것이다. 감이 좋지 않았다. 성남시와 광진구라면 송파구가 중간에 샌드위치 속처럼 끼어 있는 형국이었다. 즉각 관내 조류사육 실태 조사에 들어갔다. 문정과 장지 지구에서 불법 사육되는 조류는 8,000마리 이상으로 집계되었다. 토지보상법상 오리나 닭을 150∼200마리 이상 키우면 축산농가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노린 주민들이 해당 지역에서 개발 사업을 진행하는 SH공사로부터 손실을 보상 받기 위해 무단으로 가금류를 길렀던 것이다.       5월 8일 목요일, 당장 관내 오리와 닭 12마리를 잡아 국립수의과학검역원에 보냈다. 불길한 예감이 짙어졌다. 5월 11일 일요일 오전에 방역당국에 보낸 오리 한 마리에서 바이러스 양성 반응이 나왔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살처분이 시급했다. 서둘러 총무과를 통해 직원들에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긴급 소집 명령을 내리도록 했다. 하필 그날은 일요일, 다음 날은 석가탄신일로 이어지는 황금연휴 기간이었다. 과연 직원들이 얼마나 모일지 걱정이 앞섰다. 나중에 사실이 아니라고 판명되었지만, 앞서 다른 지역의 살처분에 동원되었던 군인이 AI에 감염되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지방의 한 자치단체에서는 공무원들이 “우리더러 죽으란 말이냐”며 살처분 작업을 거부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마음이 바짝 타들어갔다.   소집령을 내린 후 나는 타미플루 한 알을 삼키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직원들이 망설이지 않도록 먼저 앞장서서 들어가겠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현장에는 각 언론사 기자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있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직원들을 기다렸다. 하지만 걱정은 기우였다. 연휴를 맞아 부부여행을 떠났던 부구청장을 비롯해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던 직원들이 전국 각지에서 한달음에 올라왔다. 지방에서 연수 중이던 노조 임원들도 팔을 걷고 달려왔다. 그렇게 300여 명이 모였다. 뒤늦게 당도한 사람들이 미처 숨을 돌리기도 전에 조를 짜서 하우스에 들어가려는데, 이번에는 주민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지역에서 토지보상을 노리고 양봉업을 하던 주민들이었다. 그들은 살처분을 하면 벌들이 죽는다고 불평했다. 결국 현장 책임자로 SH공사의 보상 주선을 놓고 주민들과 담판을 짓는 사이에 직원들이 하우스에 들어갔다. 때는 저녁 7시30분이었다.   정말이지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직원들은 한 손에는 손전등, 한 손에는 곤봉을 들고 비좁은 비닐하우스에 들어가 어둠 속에서 길길이 날뛰는 날짐승들을 때려잡아 자루에 넣었다.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한 하우스 밖에는 커다란 포대자루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마스크를 절대 벗지 말라는 보건소장의 경고가 있었기 때문에 직원들은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채 밤새도록 날짐승들을 뒤쫓았다. 어느새 동이 터왔다. 마구 쌓아올린 자루더미 안에서 닭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본능적으로 새벽을 알리는 무고한 생명들을 보고 있노라니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작업은 다음 날 오전까지도 계속되었다. 그렇게 오래 걸릴 줄 알았다면 직원들에게 저녁밥이라도 든든히 먹일 것을, 고작 빵과 우유 하나로 밤새 무고한 생명을 몰살하는 참극에 투입된 직원들이 안쓰러웠다.   그 이튿날인 13일 화요일, 나는 당초 예정된 간부회의를 취소하고 대신 구내방송 마이크 앞에 앉았다. 직원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였다. 주저하기는커녕 당연히 할 일이라며 묵묵히 하우스로 들어가던 직원들이 떠올랐다. 울컥 하는 심정이 전해졌는지 이후 직원들로부터 크게 위로가 되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 사건 이후 직원 간 결속은 한층 끈끈해졌다. 지금 생각해도 진정 고맙고, 감사하고, 미안하고, 감동스럽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당시 현장에 여직원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소집령을 내린 총무과에서 남자 직원에게만 연락을 돌렸기 때문이다. 위험한 일이므로 당연히 여자들은 제외된 것이다.   아직도 그렇게 끔찍하고 위험하고 힘든 작업에 안 불려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여성들이 있는가? 오히려 화를 내야 하는 일임을 명심하라. 전쟁터에서는 산전수전, 공중전 다 거친 병사가 베테랑이고 조직에서는 고된 일, 어려운 일, 힘든 일을 다 거친 직원이 유능한 인재다. 험한 일이든 궂은일이든 일단 현장에 있고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혹시 빼준다고 해도 나서서 달라붙어야 한다. 그래야 경험도 생기고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도 기를 수 있다. ‘여자이니까’라는 이유로 제외되다 보면 배워야 할 일을 못 배우게 되고 나중에는 ‘경력 관리가 안 되었다’는 낙인을 받는다. 이 낙인은 더 많은 기회, 더 높은 자리로 나아갈 때 당신의 발목을 잡는다.   여성친화제도에도 비슷한 함정이 있다. ‘소수자 보호’라는 명분 아래 여성의 사회활동을 돕기 위해 만든 제도가 자칫 여성의 고위직 승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이런 사연으로 배제하고 저런 사연으로 배려하는 조치들이 여성의 경력을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어느 정도 고위직에 오른 여성이 스스로 ‘혜택’을 입었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본인의 능력이 폄하될 수 있다.   미국 노동부 산하에 설립된 ‘유리천장위원회(Glass Ceiling Commission)’는 여성친화제도가 여성의 경력 관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한 바 있다. 그 결과 이런 제도는 여성의 초기 사회 진출을 돕지만, 여성이 조직에서 의사결정권이 있는 자리에 오르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분석이 나왔다. 실제로 미국 500대 기업에서 일하는 인사담당자의 45퍼센트가 여성의 경력 관리에 여성친화제도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다.   물론 양성평등이 구현되지 않은 상황에서 여성인력 활용을 위해서는 일정 부분 여성친화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그 과정의 후반에 도사리고 있는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여성들은 각오를 두세 배 더 다져야 한다. 흑인여성으로 미국 국무장관 자리에 올랐던 콘돌리자 라이스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한 바 있다. “소수자 수혜와 무관하게 내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무엇이든 백인보다 두 배 더 열심히’를 신조로 삼고 노력했다.” 여자라서 물러서면 여자라고 물먹는다. 부지런히 경험을 쌓고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부단히, 치열히 노력하자. ‘여자 동료’ 아닌 ‘동료’로, ‘여직원’ 아닌 ‘직원’으로 어깨를 겨루는 날까지 두 배 더 과감히, 두 배 더 용감하게 살아야 한다.   최초는 짧고 최고는 길다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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