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미셸 푸코, 질 들뢰즈와 함께 철학을 공부했던 저자는

독일로 건너와 문학계로 이적한다.

이 책은 명작 『로빈슨 크루소』의 리메이크작으로

백인이자 문명인이기에 진리가 되어버린 크루소를 재해석한다.

 

항해 중 난파되어 태평양의 어느 섬에 혼자 떠내려 오게 된다.

그는 무질서한 유에서 질서 정연한 유를 창조하며

자신의 문명을 창조해 나간다.

 

"이제부터는 내가 꺠어 있건 잠을 자건 글을 쓰건 요리를 하건 나의 시간은 기계적으로, 객관적으로, 거부할 길 없이 완벽하고 정연하게, 통제 가능한 방식으로 똑딱거리는 소리에 의하여 논리화된다. 악의 힘에 대한 나의 승리를 정의해 주는 이 형용사들에 나는 얼마나 굶주려 왔던가!"

 

그러던 중 로빈슨과 우연히 인디언 소년을 구해주게 되고

방드르디(원작에 나오는 '프라이데이'의 불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새로 온 사람에게 이름을 지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가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추기 전에는 나는 그에게 기독교의 세례명을 붙여주기가 싫었다. 야만인은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 비록 그에게 물건 이름을 붙여 주는 것이 상식적으로는 옳았을지 모르겠으나 그럴 수도 없었다. 내가 그를 구해 준 요일의 이름인 방드르디로 정함으로써 나는 이 난처한 문제를 무리 없이 해결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유로운 영혼 방드르디는 크루소의 질서에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연한 사고로 로빈슨의 왕국은 화재에 휩쌓이고

모든 문명은 다시 무질서한 유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건 절망이 아닌 이제부터는 방드르디가 주도하는 시대가 열린다.

그는 놀면서 즐겁게 사는 인생에 대해 알려 준다.

 

"방드르디는 이제부터 그의 형제요 안내자요 스승이 될 것이다. 로빈슨의 겉모습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머리는 기르고 '하나님 아버지' 같은 수염은 깍는다. 방드르디와 '닮은' 모습이 되어 알몸으로 햇볕에 나간다. 방드르디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재미있게 '노는 것'을 가르친다." (작품 해설 中)

 

산업 사회의 탄생을 상징하는 로빈슨 크루소가 아닌,

그의 종 인디언 방드르디를 통해

사상의 붕괴와 인간의 원초적 모습으로의 회귀를 그린 작품.

철학의 기름을 쫙 뺀, 철학적 소설로 꽤 괜찮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M. Tournier 지음, 민음사, 2003

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