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도미니크, 1997년 作

패션 잡지 엘르에서 편집장으로 일하며 저명한 저널리스트로 활동 하던 장 도미니크에게 어느날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일이 발생한다. 여느 날 처럼 분주한 일상을 보내던 그는 갑자기 앞이 흐려진다. 그렇게 쓰러진 보비는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된다.

이처럼 급작스런 사고를 '뇌일혈'이라 불렀으며, 한번 걸렸다 하면 백발백중 죽는 병이었다. 그러다가 요즘에 와서는 소생 기술의 발달로 인해 상황이 좀 더 복잡해졌다. 죽지는 않지만, 몸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마비된 상태에서 의식은 정상적으로 유지됨으로써 -중략- 로크인 신드롬'이라고 표현한 상태가 계속된다.-p12-

전혀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된 보비에게 남은 의사소통은 왼쪽 눈꺼풀을 깜박이는 것이다. 어떤 계기였을까 그는 글을 쓰기로 결심한다. 알파벳이 쓰여진 종이를 넘기다 그가 원하는 알파벳이 나오면 눈을 깜박이고, 다시 처음부터 넘기는 식으로 하루에 반쪽 씩, 글을 써 나간다.

잠수복이 한결 덜 갑갑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면, 나의 정신은 비로소 나비처럼 나들이길에 나선다.-p13-

항상 바쁘게만 지냈던 그에게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의 신체는 잠수복과 같이 갑갑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로인해 그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자유롭게 나비처럼 날아 탐색을 하기 시작한다.

기억이야말로 감각의 무궁무진한 보고이다. 먹고 남은 음식만을 가지고도 새롭게 먹을 수 있도록 조리하는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나에게는 기억을 더듬어 오래오래 음미하는 기술이 있다.-p50-

나는 점점 멀어진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멀어지고 있다. 항해중인 선원이 자신이 방금 떠나 온 해안선이 시야에서 사라져 가는 광경을 바라보듯이, 나는 나의 과거가 점점 희미해져 감을 느낀다. 예전의 삶은 아직도 나의 내부에서 불타오르고 있지만 점차 추억의 재가 되어 버린다.-p105-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기회를 갖게 된 보비는 나비가 되어 자신의 과거를 탐색한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 인생이 주마등 처럼 펼쳐진다고 이야기한다. 마치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 안에서 추억을 여행하는 그에게 시간이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닌 상대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그에게 1분이란 시간도 행복했던 과거의 어느 하루를 떠올리기에 충분한 시간이 되었던 것이리라. 그리고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시간이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뒤늦게 시간의 소중함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대로 지나가 버리는 시간이 너무도 아쉬워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한편으로는 이렇듯 정지한 듯한 시간이 다른 한편으로는 미친 듯이 재빨리 달음박질치는 것은 무슨 역설에서일까?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나의 보잘 것 없는 세계에서 한 시간은 한없이 늘어지지만, 바낻로 한 달은 마치 번개처럼 순식간에 달아나 버린다.-p137-

사실 뇌일혈에 걸리면 식물인간과 같은 상태에 빠진다고 한다. 그런면에서 보비는 한 쪽 눈일지언정 깜빡일 수 있는 행운을 가졌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마음을 글로 써 책에 담는다. 이와같은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글을 통해 보비와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으니까...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