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이라는 말이 언제부터 모호한 의미를 담고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회색인이라는 말은 참 익숙하다. 책을 고를 때에는 아무런 무늬없이 하얀 페이지에 회색 글씨로 "회색 영혼" 네 글자만 적혀있는 것이 묘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난생 처음보는 작가라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프랑스 특유의 섬세한 문장때문일까. 어지럽게 사건들을 나열하고 있지만 점점 제자리를 찾아가는 내용이 계속해서 빠져들게 만들었다.

 

온 세계가 전쟁에 빠진 1차 세계대전이었을 것이다. 나라가 쑥대밭이 되고 젊은 청년들은 죽어나가는 마당에 유독 평화로운 한 마을이 있다. 남자들은 공장에 다니면서 돈을 벌로 여자들은 집안일을 하면서 살았던 유일한 마을이다. 이 마을에 한 여인이 들어서면서 마을은 더욱 활기를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의 자살과 꽃같이 아름다웠던 술집 주인의 막내딸 "벨 드 주르"의 타살로 마을은 다시 침울해진다. 그 속에서도 사람들을 안하무인하며 자신의 배를 채우는 판사, 장교와 그리고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검사 데스티나가 글 속에서 심심찮게 등장을 한다.

 

"개새끼도 성자도, 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완전히 시커먼 것도 없고, 완전히 새하얀 것도 없다. 있는 건 회색뿌닝야. 인간들도, 그들의 영혼도, 다 마찬가지지. 너도 회색 영혼이야. 우리 모두처럼 빼도박도 못할 회색이지." (122쪽)

 

예의바르고 공정할 것 같았던 검사 데스티나가 소녀를 죽인 범인으로 가정이 되며, 마을을 아름답게 비춰주었던 여인 리지아는 미소를 띤 채 속으로 뭉그러져가던 상처를 받은 여인이었다. 돈보다도 사람을 먼저 생각했던 가난뱅이 의사는 굶어 죽었고, 약한 자를 마구 짓밟던 판사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시체를 옆에 두고 달걀 반숙을 맛잇게 먹는 미에르크 판사, 데스티나 검사를 위해 늘 최고급 자리를 비워두는 브랴슈, 화자의 유일한 친구이자 가죽을 주워가며 연명하는 조세핀 등, 뚜렷한 캐릭터를 가진 사람들이 조연으로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한껏 부풀려진다.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마을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았던 화자가 마지막에 죽은 아내에게 고백하는 장면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결국 마지막 그 이야기를 위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행동에 정당화를 요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 회색 영혼이다. 뚜렷한 가치관 없이 세상이 시키는 대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살아가는 목적 없는 인간들일 뿐이다. 그러니 이 곳에서는 모든 행동이 용서받을 수 있고 이해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유모를 불안과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 중일 것이다. 누군가는 위안을 받고 싶기도 하고, 자신이 하는 행동들을 누군가가 이해해주고 응원해주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갈망할 필요는 없다. 성자도 짐승같은 사람도 없고 정답도 오답도 없는 세상이다. 그저 그런대로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