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살. 아이의 입에서는 어른의 말이 술술 나온다.
「 사람들은 참 이상해. 엄마가 이혼한 사실만 중요하게 여겨.
하지만 그 이전에 엄마가 세번이나, 자식을 낳고 오래도록, 어쩌면 영원히 함께하고 싶을 정도로 사랑했다는 것은 알려고 하지 않아.」

즐거운 나의 집을 읽다가 나는 은희경 작가의 소설 '새의 선물' 을 떠올렸다.
그러다 문득, 아 은희경이 아니었지.. 그럼 공지영은 어떤 사람이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이 공지영의 자전적인 소설이라는 것을 읽는 도중 알게 되었다. 주인공 시점(18세 소녀)에서 바라보는 '엄마'에 대한 이해가 깊어서, 마치 잘못한 후 거울을 보며 자책하는 듯 해서  '혹시..'하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작가 공지영을 검색하여 관련 기사를 보니, 역시. '엄마'는 공지영 자신이었다.

얼마 전 베스트셀러였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에서처럼 작가는 계속해서 용서, 화해, 사랑.. 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세번의 이혼에 대한 변명처럼 들릴 지도 모르는 이 글을 연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잠 못이루는 밤과 마셔버린 술이 있었을까.
생각하니 한줄한줄이 마음아팠다.

소설을 모두 읽고 난 후에는 내가 그녀의 글을 보며 마음아파한 것이 미안해졌다.
이 세상 어떤 누구도 자기자신을 사랑할 수만 있다면 결코 불행하지 않다.
그것은 자신의 선택이다.
타인의 불행을, 인생을 논하지 말라.



+ 밑줄긋기

세상에 좋은 결정인지 아닌지, 미리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만 어떤 결정을 했으면 그게 좋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노력하는 일뿐이야.
1부 여름 (4)

엄마가 마스카라 운운하는 것을 보니 이제 좀 감정에서 벗어나는 모양이었다. 이게 엄마의 단점이자 장점이다. 슬픔에 오래도록 잠겨 있지 않는다는 것. 울 시간은 많으니까 밥도 미리 먹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그중에서 먹는 걸 엄청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게 제일 좋았다.
1부 여름 (5)

그래서 나는 얼른 엄마 식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엄마는 언제나 어떤 일의 좋은 점도 있다는 걸 명심하라고 했다. 그래, 좋은 일도 있다. 내가 아빠의 곁에 있을 때는 날마다 다른 일을 하며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엄마가 무엇을 할지 상상할 수 없었지만 이제 엄마의 집에서 나는 아빠가 무엇을 하는지 다 알고 있으니까. 그러자 이상하게도 아빠와 함께 있을 때는 내게는 숨이 막혔던 아빠의 그 정확함이 좋은 점도 있다는 걸 나는 또 깨닫게 됐다.
1부 여름 (13)

사랑을 한다는 것은 머물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산 사람의 몫이니까. 산 사람은 키와 머리칼이 자라고 주름이 깊어지며 하루에 천 개의 세포를 죽여 몸 밖으로 쏟아내고 쉴 새 없이 새 피를 만들어 혈관을 적신다. 어제의 나는 분명 오늘의 나와는 다른 것이다. 그런데 또 어제의 나도 오늘의 나인 것이다. 이 이상한 논리의 뫼비우스 띠가 삶일까?
1부 여름 (16)

"엄마는 행복해?"
내가 물었다. 엄마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가만히 웃었다.
"응, 행복해. 우선 네가 있어서 그렇고. 또 죽을 것 같은 강물을 어떻게든 건너온 자부심도 있어. 아침마다 생각해. 오늘은 우주가 생겨난 이후로 세상에 단 한 번밖에 없는 날이다. 밤새 나는 이렇게 죽지 않고 살아 있다…. 아이들도 아프지 않고 잘 자고 있다. 새벽녘 창밖은 아직 싸늘한데 우리 집은 따뜻하다…. 언제부턴가 그게 얼마나 축복인지 알게 되었거든. 엄마랑 이렇게 사는 일, 새로 시작하는 일, 그렇게 장밋빛이지만은 아닐 거야. 힘이 들 때면 오늘만 생각해. 지금 이 순간만. ……있잖아 그런 말 아니? 마귀의 달력에는 어제와 내일만 있고 하느님의 달력에는 오늘만 있다는 거? …."
1부 여름 (17)

"어떤 순간에도 너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을 그만두어서는 안 돼. 너도 모자라고 엄마도 모자라고 아빠도 모자라….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모자람 때문에 누구를 멸시하거나 미워할 권리는 없어. 괜찮은 거야. 그 담에 또 잘하면 되는 거야. 잘못하면 또 고치면 되는 거야. 그 담에 잘못하면 또 고치고, 고치려고 노력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수가 있는 거야. 엄마는…… 엄마 자신을 사랑하게 되기까지 참 많은 시간을 헛되이 보냈어."
2부 즐거운 집 (31)

“말이다. 이 세상에 네 잎 클로버가 다이아몬드였다면 아저씨는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되어 있었을 거야. 가끔 생각해 보곤 하지. 세상이 노래를 잘 부르는 순으로 잘난 순서를 매긴다면 아저씨는 꼴찌일 거야. 노래를 진짜 못하거든. 춤을 추는 순서로 매겨진다고 했었으면 아저씨는 정말 거지가 되었을 거야. 날씬한 순서로 서열을 매긴다면 -얼마간 그렇기는 하다마는- 아저씨는 또 거의 거지가 되었겠지. 지금 네가 살고 있는 세계는 성적으로 매겨지는 듯하니까 네가 그렇게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괜찮다. 위녕,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아. 세상에는 많은 서열이 있고 많은 점수가 있어. 네가 잘하는 것, 그래서 하면 할수록 더 하고 싶은 것 그걸 하면 돼. 대신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3부 가을 (85)

나는 비로소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새엄마를 조금은 다른 눈으로 쳐다볼 수 있었다. 엄마 말대로 섣불리, 쉽게, 모두 다 용서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건 다른 일이라고 해도, 이제는 그저 어쩌면 동등한 한 결점투성이 인간을 바라보는 그런 여유 같은 것이 내 안에서 처음으로 싹트고 있었다. 그러자 나는 내가 비로소 어른이 되기 10미터 전에 와 있는 것을 깨달았고 그토록 바라던 어른이 되는 것이 싫고 실은 무서웠다.
3부 가을 (102)

“그게 어떤 곳이든 그곳이 네가 최선을 다해야 하는 자리야…. 엄마가 좋아하는 시인의 시를 빌려 말하면 이런 거지. 시방 네가 앉은 그 자리, 그 가시방석이 꽃자리니라! 야.”

어젯밤 엄마와 함께 맥주를 마실 때 엄마는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시인들은 정말 멋있어…. 어떻게 같은 말을 그렇게 멋지게 할까….”
그때 나는 엄마의 손을 잡았었다.
“엄마, 엄마가 바로 우리 엄마라는 사실이 더 멋있어.”

그때 엄마의 얼굴은 나를 보고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금방 구겨졌고, 그리고 눈물이 고였다. 참 엄마는 잘도 운다. 그리고 물론 나도 그렇다. 그래서 나까지 울어버릴 것 같아 나는 얼른 맥주잔을 입에 댔다.
“그래… 예전에는 아니었는데, 많이 아니었는데… 엄마도 이제는 내가 나인 게 좋아.”
나는 그때 우리가 다시 만나 함께한 여섯 계절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깨달았다.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끔은 엄마가 자주 집을 비우는 것이 서운했고, 그리고 가끔은 동생들이 귀찮고 얄미웠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도 있었다. 나 역시 나 자신을 좋아하게이제는 내가 그냥 나인 게 좋아.”

...

음, 뭐 딱히 맞는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사랑한다고 해서 그걸 꼭 내 곁에 두고 있어야 한다는 건 아니란 걸 나는 이제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최선을 다해 존재함으로써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5부 봄 (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