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 Une via francaise

프랑스, 그곳은 내게 늘 꿈같은 곳이다.
아무런 부정부패도 생활고조차도 없을 것만 같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커피와 바삭한 바게뜨만 가득 존재할 것 같은 그런 곳 말이다.

프랑스적인 삶, 그 또한 포근하고 따뜻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펼쳐본 그 곳은 이미 프랑스가 아니었다.
역사를 짊어지고 속내를 내보인 그 곳은 죽음과 배신, 무관심이 가득한 현실이었다.

소설은 1958년의 대통령의 이름인 샤를 드골,이라는 소제목으로 출발한다.
마치 정권의 교체에 따라서 자신의 인생 또한 바뀌어 간다는 듯이..
한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치에 대한 아무런 관심도 없는 나같은 사람조차도) 어쩔 수 없이 정권의 교체에 따라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영향력 아래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일일 것이다.

프랑스가 많은 수난을 겪으며 변화되었듯, 블릭 또한 많은 수난과 역경을 겪으며 늙어가고 변화된다.
블릭과 그의 주변인들은 끊임없이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신의 존재에 대해 부인하지 않지만, 신을 믿지 못하고 원망 혹은 외면하는 그들.
그리고 끊임없이 주변인들을 배신하고 또 배신당하는 그들.
블릭의 어두운 인생에 유일한 빛은,
어린 시절의 멋모르는 열정도, 암실에서 은밀히 나누던 이웃과의 섹스도 아닌 작고 귀여운 손녀이다.
가족에게 아무런 도움도 위안도 받지 못한 채, 늘 외면당했던 그였지만 결국은 그의 손녀에게서 최후의 작은 위안을 얻는다.

끊임없이 가족구성원으로 살아가면서 그 안에서 아무런 행복도 느끼지 못하는 블릭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이처럼 개인주의적으로 변했다는 것이 슬펐다. 나 또한 그렇게 변해가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에 더 슬펐다.

가족 안에서 위안을 얻고 나 또한 가족에게 위안을 주며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문득 다짐했다.
그것이 역사의 어두운 흐름을 거슬러가는 '슬기다운 삶'이 되기를 바란다.



그 리듬에 맞추어 우리는 늙어갔다. 나이도 먹기 전에 이미 늙었다. 강행군으로 배워야 했고, 팔꿈치를 책상 위에 올려놓지 않고 밥먹는 것을 배워야했다. 자유형과 배영 등 여러 가지 자세의 수영, 똑바로 있기, 콧구멍에 손가락 집어넣지 않기, 대꾸하지 않기, 조용히 하기, 자신을 다스리는 것을 배워야 했다. 결국 그 시대에 '인간이기를 배우는 것'이었다.
p41

그러나 그 방면에 나는 어떤 환상도 품지 않았다. 사랑을 일종의 믿음으로, 인간의 얼굴을 한 종교의 형태 중 하나로 여겼다. 신을 믿는 대신에 신과 다른 것을 믿었다. 정확히 말하면, 다른 것이란 신보다 더 오래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자기 자신의 거짓된 그림자일 뿐이었다. 깊이를 잴 수 없는 고독의 공포를 가라앉힐 거울일 뿐이었다.
우리 모두는 모든 사랑 이야기가 유일하고 예외적이라고 믿는 허약함을 가졌다. 어떤 것도 가짜가 아니다. 우리의 가슴에서 느끼는 열정은 똑같고 다시 만들어낼 수 있으며 미리 알 수도 있는 것이다. 최초의 벼락이 지나고 나면 끝도 없는 권태의 복도에 나타나는 습관의 긴 나날들이 온다. 이 모든 것은 우리 가슴 한가운데에 차례로 자리잡는다. 그 주기의 리듬과 강도는 오로지 호르몬의 비율에 달려 있다. 우리 분자의 기질과 염색체 접합의 빠르기에 달려 있다.
우리의 엄격한 교육은 그 나머지를 담당한다. 말하자면 몽롱해진 정신, 팔딱거리는 심실, 꼿꼿한 꼬리가 우리 같은 유한한 존재에게 적합한, 알 수 없는 신이나 초자연적인 은총의 매우 행복한 표시이다. 사랑은 우리가 키워나가야 할 것으로 배운 이런 고도의 감정 중 하나이다. 죽음을 기다리면서 우리가 참도록 도와주는 아편과 같은 휴식에 속한다.
p235-236

내 가족 모두를 생각했다. 그 의혹의 순간에, 그토록 많은 사람이 나와 함께 있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에, 그들은 나에게 어떤 도움이나 위안도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놀라지도 않았다. 인생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묶어놓고서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존재의 시간에,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기보다는 차라리 단지 그 무엇이라는 것을 믿게 하는 보일 듯 말 듯한 가는 줄에 지나지 않으니까.
p393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