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원작


난 확실히 열성적이었다. 나는 눈충 받을 짓은 안 했다. 아무튼, 관계가 끝나버리기 전까진 그랬다. 선을 넘는 법도 없었는데, 넘어도 될 법한 때조차 안 넘었다. 게다가 친절하고 진실하며 사려 깊고 헌신적인 데다, 그녀 신상에 관한 일을 기억해주고,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해주고, 최근에 나눈 대화에서 힌트를 얻어 작은 선물을 사주었다. 물론, 이 모든 일을 억지로 한 적은 없었다. 계산속으로 한 적도 결코 없었다. 찰리에 관한 일은 뭐든 쉽게 기억했는데, 그건 내가 그녀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27

나의 비범함은 (그렇게 불러도 될지 모르겠지만) 엄청난 양의 평균치를 한데 모아서 하나의 틀에 꽉꽉 채워 넣었다는 데 있다. 나 같은 사람이 수두룩하다고는 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많은 녀석들이 나무랄 데 없는 음악적 취향을 가졌지만 독서와는 담을 쌓았고, 많은 녀석들이 책은 읽지만 심하게 뚱뚱하고, 많은 녀석들이 페미니즘에 동조하지만 머저리같이 턱수염을 길렀고, 많은 녀석들이 우이 앨런 식 유머감각을 가졌지만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 많은 녀석들이 운전대만 잡으면 멍청한 행동을 일삼고, 많은 녀석들이 싸움질에 휘말리거나 돈 자랑을 하거나 마약을 한다. 난 그런 짓은 전혀 하지 않는다. 정말이다. 내가 여자들과 잘 지낸다면, 그건 내가 가진 장점 덕분이라기보다 내가 가지지 않은 단점 때문이다.
p36

이건 '물이 반이나 남았느냐, 반밖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작은 병에 꽉 차있던 물을 커다란 빈병에 쏟아 부은 거나 마찬가지다. 예전엔 그 안에 얼마만큼 들어있는지 알고 싶었지. 이제는 안다.
p147

그녀는 알게 뭐람 하는 얼굴이었다. "그래, 넌 레이보다 날 훨씬 더 많이 웃게 만들어. 네가 확인하고 싶은 게 그거라면 말이야."
난 잘난 척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건 척이 아니었다. 진짜였다.
"하지만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 로브. 정말이야. 내가 웃다가 앰뷸런스에 실려 나갈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게 차에 실은 짐을 다시 내려놓을 거라는 걸 의미하진 않아.네가 날 웃길 수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 내가 모르는 건 그밖의 다른 것들이지."
p230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하이 피델리티는 30대 중반 미혼의 영국남자 이야기다.
능력은 별로 없고, 매력도 별로 없다. 사실, 있는게 별로 없다.
단, 음악 하나만은 빠삭하다.
좋아하는 가수와 노래를 기준으로 상대방을 평가하는 이 남자는 그 기준만큼이나 인간관계에 서툴다.
쯧.. 서른다섯이나 먹어가지고는.

그치만 나도 그를 나무랄 처지는 아니다.
나도 사실 그러고 있지 않나..
뭔가 내 기준대로 평가하고 판단내리고.
어쨌든 로브는 사랑에 대한 열정이 넘치지 않는가..
이건 좀 배워야지. 열정.


어렸을 적에는 모든 게 재미있었다. 조립식 자동차, 정글북, 비글즈 시리즈, 0011 나폴레옹솔로... 내가 어디 있는지, 지금 몇 시인지, 누구랑 있는지도 몰랐다. 어른이 되어서는 오로지 섹스를 할 때만 (다소 차이는 있지만 야리꾸리한 영화를 볼 때도)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었다.
... 섹스만이 내가 유일하게 방법을 터득한 어른의 짓거리라니 참 묘하다.
p141

닉혼비의 글은 팔딱팔딱 뛰는 물고기처럼 생생하다.
당장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를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