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만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2초에 한 명씩 죽어가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유엔의 관료주의 장벽도 조직 내 냉소적 비아냥도 독재자에게 아부한다는 비난도 두렵지 않다.

독재자나 살인광과의 협상도 마다하지 않았던 유니세프 3대 총재 제임스 그랜트.

간단한 소개글만 봐도 정말 대단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총재 재임 시절

2500만 명의 어린이가 생명을 건졌다고 추산되었고 그가 시작한 아동 생존 혁명으로

1980년 16-17%였던 예방 접종률은 1991년 80%를 넘었다고 한다. 예방 접종으로 매년 300만 명,

경구 재수화염으로 100만 명이 목숨을 구한 이 대단한 사람이 왜 역사에 묻혔을까?

그의 업적에 비해 그가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까워서 그의 일생이 더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고나니 정말 그렇게 열정이 가득하고,

자신의 신념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일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흔치 않으므로

그를 눈엣가시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가 일하는 방식이 모두 다 옳다고 할 수는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가 왕성히 활동하던 시기나 지금도 전쟁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희생되고 있는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합법적인 것만 고집할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그의 편을

들어주고 싶어졌다. 그가 재임하던 기간 세계 곳곳에서 내전과 전쟁이 벌어졌다.

취임 초기 캄보디아에서부터 엘살바도르, 아이티,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수단, 유고슬라비아 등등...

과거의 일만이 아니라 현재 진행중이라는 사실이 가슴 아프다. 어쨌든 전쟁의 큰 피해자는 어린이들이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는 총탄에 맞아 죽는 아이들도 심각하지만 전쟁 때문에 제때 예방 접종을

받지 못하거나 영양 공급이 어려워 죽는 아이들 숫자도 여전히 많으니 그 당시에는 오죽했을까...

그래서 그가 낸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는 전쟁을 잠시 멈추고 필요한 구호품과 의약품을 전달하자는 것,

그의 별명처럼 '미친 미국인'다운 소리였는데 결국은 그의 대담한 아이디어와 협상력으로

내전 중인 엘살바도르에서 전쟁을 멈추게 하는데 성공했고 이후 수단, 레바논, 아프가니스탄 등에서도

일시 휴전을 한 상태에서 예방 접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게 했으니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인류 발전의 혜택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돌아가야 하는 게 옳은 법칙이니까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모든 것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많아야 더 살기 좋은 세상이 구현될텐데

이런 사람들은 여전히 괴짜 취급당할 만큼 소수이니 아쉬울 따름이었다.
예방 가능한 아이들을 죽음을, 당연시 여기고 무감각해져 버린 아이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온몸을 던져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사람... 아이들이 어떤 종교 안에서 자랐는지, 어떤 언어로 이제 막 입을 떼기 시작했는지

자라서 무엇을 이룰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는지 상관없이 그들이 태어난 세상에서 버림받는 생명의 낭비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마땅한 사람의 의무라고 믿었던 사람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