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저항시인이 된 윤동주, 그것이 그를 죽게 한 이유다!" 라는 문구와

동주라는 그 이름만으로도 아련함과 함께 그의 또 다른 이야기가 궁금해져왔다.

윤동주...

그 이름만으로도 영원한 청년으로 순수한 청년으로 모든 이의 마음을 짠하게 하는 시인이 또 있을까?

대한민국 사람치고 윤동주 시인의 시 한 편을 외우지 못하는 사람이 존재할까?

그만큼 그는 우리와 가까우면서도 아련하게 먼 사람이다...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사춘기 시절 단순한 소녀 감상에 그의 시를 읽으며 이 꽃미남 시인은 정말 조국의 절망에 분노했을까?

물론 분노는 했겠지...그치만 그가 정말 남기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그냥 사람 좋은 선한 인상이라서 그럴까, 독립투사의 결단한 의지가 보인다기 보다는

그냥 인간 윤동주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그 편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었다.

민족저항시인이니 뭐 그런 수식어들은 후세 사람들이 덧입히는 것이니까...

많은 작품들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시 태어나는 법이니까.

난 그냥 다소 나약해보이나 심지가 곧은 준수한 시인의 모습을 막연히 좋아했었던 것 같다.

삶에 대한 성찰과 부끄러움과 고뇌하는 모습이 소녀의 갈팡질팡하는 마음과 잘 맞아떨어졌던 것 같다.

착한 사람들이 더 일찍 죽는 불의한 세상에 대해 허망함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해피엔딩을 꿈꾸던 사춘기 여중생이

시집 속의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다보며 나중에 이런 사람이랑 결혼해야겠다는 맹랑한 생각과 함께...^^

그렇게 윤동주 시인은 다양한 모습으로 많은 이들의 동경과 사랑 속에 영원히 남아 있는 게 아닐까?

그러다가 동주...란 제목과 민족저항시인이라는 관형사의 연속이 명예롭고 비장하고 애절하여 무거워서

열사와 영웅의 묘소에 잠들게 된 시인의 꿈이 혹 말마다 거친 것은 아닐까 하고, 투구와도 같은 관형사를 조심스레 벗겨

인인 윤동주로 묘역에 이장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이 와닿았다.

그래서 읽게 된 이 책은 동주의 이야기이나, 동주를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각각 다른 목적으로 동주와 관련된 유고를 찾아나섰지만 직접 만날 수도 없이 스쳐지나가게 되지만

그렇게 어긋나며 조각을 끼워 맞춰나가며 자신을 찾아갈 수 있게 된 이야기...

더듬는 말, 참람한 말, 사이의 말, 숨은 말, 어머니의 말, 기억하는 말, 없어도 있는 말, 피 같은 말, 본래의 말,

물가에서 나눈 말, 허공중에 떠도는 말, 꽃의 말, 작가의 말...

작가는 언어에 대해 말해주고 싶었으나 난 그냥 내 방식으로 이해하련다.^^

 

텐도 요코가 열 다섯 글을 막 배우기 시작하면서 쓴 일본어의 연필 글씨,

그 요코가 죽어가는 시인의 모습을 목격한 숙부가 동주의 짐을 정리해가며 남긴 한 마디로 인해

자신에 대해 알게 된 그녀가 이타츠 푸리 카라는 이름으로 마흔이 넘어 배우게 된 아이누어로 남긴 펜 글씨,

그리고 야마가와 겐타로가 안인 김경식으로서 한국어로 쓴 글씨...

활자체에 따라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소설이라는 것을 알고 읽기 시작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동주를 기억하고, 동주의 유고를 바로 곁에서 지켜본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어디까지가

소설이고 진실일까 궁금해지는 책이었다.

 

	여기에 좋은 글귀를 넣어주세요
내가 사람의 말을 처음 제대로 알아들었던 것은 어머니의 '죽고 싶다'였다. 어쨌든 그렇게 기억한다. 내 입으로 처음 했던 말도 엄마나 아빠가 아니라 '싫어'였다. 어머니의 기억이니 분명할 것이다. 나는 그런 말처럼 자라고 그런 말처럼 키워졌을 것이다. 그런 말을 듣고 그런 말을 하며 그런 말 가운데 살았을 테니까. 어머니의 말, 아버지의 말, 나의 말. 그것이 그때까지의 나였을 것이다. 그 말을 하던 그때까지의 나. 참담했던 나. 참람했던 말들. 사광이아재비 같은.
페이지 : 47

 

	여기에 좋은 글귀를 넣어주세요
동주는 고향과 나라를 모두 일본에 잃고 말까지 앗겼다. 어디에 있든 그의 땅이 아니었다. 교토든 간도든 시인의 영토가 아니었다. 언어의 영토를 잃은 시인의 슬픔이 느껴졌다.  동주와 내가 다른 점이 그거였다. 나는 고향을 버렸고, 동주는 잃었다. 버린 사람은 교만하고 버릇없고 사나워졌다. 잃은 사람은 망설이고 머뭇거리고 부끄러워했다.
페이지 : 95

	여기에 좋은 글귀를 넣어주세요
그 기분을 적기 위해 나는 조금 전 할글 역순사전을 뒤졌다. 가장 가까운 뜻이 '수꿀스럽다'였다. 수꿀스럽게, 시게하루는 그날 새벽, 나에게 들어온 것이다. 호감도 비호감도 아니면서 그 둘 다인것, 어딘가 두려우면서도 받아들여야만 하는 숙명 같은 것. 아파 떨쳐내고 싶으나 내 안의 장기 같아 차마 그럴 수 없는.
페이지 : 223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된 말. 수꿀스럽다...

	여기에 좋은 글귀를 넣어주세요
명준이를 얘기하려는 거라면 그만하자. 일본 세력보다 더 무서운 적은 우리 안에 있어요. 과장된 명분으로 서로를 억압하고 배척하고 싸우고 죽이죠. 일본인들이 우릴 가만 놔둬도 자멸할 판이에요. 명분을 과신하는데, 그 과신은 자신 없고 불안하기만 한 유약한 마음을 드러내는 일일 뿐이에요. 그러는 동안 대륙낭인과 일본 세력의 배후는 그 활약이 나날이 대범해지고 있습니다.
페이지 : 263

	여기에 좋은 글귀를 넣어주세요
동주가 조선인으로 살고자 했던 것은 그것이 더 좋고 더 나아서가 아니라 고유성을 지키려 했던 거고, 그것을 잃으면 실상 모든 것을 잃는다는 신념 때문이었을 게야. 들판의 모든 꽃이 사쿠라가 돼버리면 세상에는 꽃이란 것 자체가 없어지는 거란다. 사쿠라는 다른 꽃이 있어야 사쿠라인 게지. 일본은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문명을 사칭하여 남의 나라를 강압적으로 침략하고 지배하고 있어. 망하는 길이지. 동주는 동주의 꽃을 피우려 했을 뿐이야. 시인이라면 백화가 만발한 꽃동산의 아름다움을 잊지 못하니까. 꽃은 서로 다르되 향기의 숨결로 생명을 나무며 함께 숲을 이루지. 다르면서 서로 의지하고 교통하는 생존의이치를 아는 시인이라면 남을 치거나 미워하지 않는단다. 다만 자기를 지키다 꽃처럼 고요히 죽어갈 뿐이지. 이런 시인은 어쩌면 험악한 세상을 바꾸지 못할지도 몰라. 하지만 아무리 험악한 세상도 이런 시인을 결코 바꾸진 못한단다. 앞으로 미친 세상은 마땅히 이래저래 바뀌겠지만 동주와 같은 시인은 시인으로 영원하다. 모두가 자기의 고유성을 죽음으로 지킬 때, 동화를 명분으로 앞세운 침략의 야욕은 필패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지.  교진은 전에 없이 침통해하며 많은 말들을 쏟아냈다.
페이지 : 298

	여기에 좋은 글귀를 넣어주세요
나 이타츠 푸리 카가 보기에 동주의 죽음은 저항인의 저항적 죽음이 아니라, 시인의 시적 죽음이었다. 그의 망설임과 부끄러움은 연약한 이의 성정이 아니라, 세상의 온갖 가차 없는 것들에 대한 반성이었으며 고요한 자기 응시였다. 굳이 저항이었다고 한대도 그것은 국가나 민족 차원의 것이었다기보다는 더 근본적으로, 모든 여지없는 것들에 대한 의도적 머뭇거림어었으며 성찰적 저항이었다. 가차 없는 것이라면 제국주의는 물론 학교와 교회와 해방투쟁을 막론하고 그는 분연해했으며, 분연해했으되 끝내 자기의 자기 됨, 즉 시인으로서의 자신을 지키는 방식을 택했다. 시가 죽을 때 그를 동반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마침내 민족 시인을 넘어 그를 인류의 시인이라 부를 수 있는 것도.  그는 시와 함께 죽었다. 그랬으므로 죽음 이후의 시, 강제 번역된 시는 시가 아니며 더구나 그의 시일 수 없다. 그가 영원한 시인으로 우리 곁에 살아남으려면 시와 함께 죽기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원본 없는 강제 번역 원고는 마땅히 사라져야 한다.
페이지 : 397-3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