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펼치며  

 

   ‘언어영역 문제집에 숱하게 등장하는 양반전, 호질 등의 저자’.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 두 가지의 정의가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올리는 박지원에 대한 단상일 것이다. 그랬다. 나는 그를 조선 후기의 학자로서의 면모로 국사 책에서 먼저 발견한 것이 아니라, 풍자와 역설의 기법을 구사한 소설가로서의 면모로 국어 책에서 박지원과 처음 조우했다. 양반전이나 호질 등을 통해 바라 본 박지원의 모습은 그야말로 익살꾼이었다. 하지만 풍자와 해학의 걸작이라는 그의 글에 대한 평가들은 익살꾼의 이미지와 더불어 날카로운 관찰력과 판단력도 갖춘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했었다. 비록 남겨진 그의 초상 속에서는 보는 이를 압도하는 좋은 풍채와 매서운 눈매가 가장 먼저 눈에 띄지만 이제부터 내가 풀어놓을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의 내용을 접하면 박지원의 초상 속에서 장난기 어린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인 밴드와 ‘백탑청연’

 

  반고와 사마천과 같은 문장을 타고났지만 까닭 없이 비방을 당한다는 마갈궁의 사주. 박지원은 이 마갈궁의 사주에 속했다. 그래서였을까? 가문의 촉망받는 인물로 입신양명의 길을 가기 위해 과거 시험을 준비하던 그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고 결국에는 과거를 폐하고 재야의 선비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당시 그의 문장에 대한 명성이 자자하여 과거시험을 주관한 자들이 그를 꼭 합격시키려고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과거를 폐하기로 결정한 것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그의 결단에 대한 저자 고미숙의 견해는 나의 시선을 붙들었다.

 

 “ 지배적 코드로부터의 탈주는 한편으론 고독한 결단이지만, 다른 한편 그것은 늘 새로운 연대와 접속으로 가는 유쾌한 질주이기도 하다.(p.49)”

 

새로운 연대와의 접속. 이 말이 너무 맘에 들어 나는 더더욱 그가 교류했던 사람들과 그의 벗에 대한 생각에 시선이 머문다. 저자 고미숙은 “연암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은 의기투합하는 벗들과 서로 어울려 뒹굴던 때였다(p.58)”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백탑에서의 청연’이라고 하는 것이다. 일명 연암 그룹에 속한다고 하는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은 매번 만나면 며칠을 함께 지내며 여러 분야에 대한 지식들을 교류했다고 한다. 또 이 ‘지식인 밴드’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이들의 모임에는 늘 음악이 함께 했었다고 한다. 언젠가 한 선배가 나에게 ‘책을 좋아하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말에도 동의하지만 더불어 나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냥 습관처럼 귀에 이어폰을 꽂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즐기고 흥얼거릴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생의 여유와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고 토론을 즐기고 게다가 음악까지 조예가 깊었다던 연암과 그의 벗들. 내 머리 속에 담겨진 정말 이상적인 지식인의 모습이다. 만약 지금 나와 더불어 이런 이상적인 교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연암이 정의한 벗에 대하여 기꺼이 들려주리라.

 

"벗이란 '제2의 나'다. 벗이 없다면 대체 누구와 더불어 보는 것을 함께 하며, 누구와 더불어 듣는 것을 함께 하며, 입이 있더라도 누구와 함께 맛보는 것을 같이 하며, 누구와 더불어 냄새 맡는 것을 함께 하며, 장차 누구와 더불어 지혜와 깨달음을 나눌 수 있겠는가? 아내는 잃어도 다시 구할 수 있지만 친구는 한 번 잃으면 결코 다시 구할 수 없는 법, 그것은 존재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절대적 비극인 까닭이다. (p.57)"

 

 유머는 박지원의 힘!

 

 유머의 천재, 파라독스의 달인, 스마일(笑笑) 선생. 이것은 모두 저자 고미숙이 연암을 가르키는 수식어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저자는 열하일기를 “호모루덴스(놀이하는 인간)가 펼치는 개그의 향연(p.197)"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제목에서부터 추측할 수 있듯이, 저자는 열하일기 전반에 걸쳐 박지원의 해학가적인 모습을 부각시키는 글들을 재미나게 엮어 풀어 놓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저자의 해석은 열하일기의 원본을 접해 보지 못했던 나에게 박지원에 대한 선입견을 심어 줄 수 있기에 조금은 두렵기도 했다. 기회가 되어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원본으로 접한다면 나는 그 때 나만의 해석으로 열하일기를 접하기는 힘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혹 그렇다고 해도 저자가 풀어놓는 박지원과 열하일기에 대한 해석은 나로 하여금 열하일기의 전문을 꼭 읽어봐야 하겠다는 생각을 이끌어 낼 정도로 흥미로운 것이었다. 그 하나 하나 흥미로운 부분들을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다만 박지원의 개구쟁이 같은 모습을 엿볼 수 있었던 일화 하나는 아직도 인상깊다. 연경에 머무르던 순간이었는데, 깊은 밤에 발자국 소리가 요란스레 들리더니 누군가가 열하로 가게 되었다는 전갈을 전해준다. 수행원인 내원과 변계함이 소란스러움에 놀라 깨어서 관에 불이라도 났냐고 묻자 연암은 연경에 몽고 기병 십만 명이 쳐들어 왔다며 장난을 친다. 이 말에 속아넘어간 수행원들이 통곡을 하고 난리가 났단다. 다들 아득한 북쪽 땅 열하까지 갈 생각에 힘들어하는 상황에서 오직 연암만은 너스레를 떨며 장난을 친 것이다. 연암의 장난에 속아넘어간 수행원들이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러한 장난기 어린 모습 속에서 그의 근엄한 학자로서의 모습은 잠시 잊혀진다.

  북벌 vs 북학

 

 연암은 이용후생의 기치를 내건 실학자다. 이런 정의는 “이용이 있은 연후에야 후생이 될 것이요, 후생이 된 후에야 정덕이 될 것이다. 대체 이용이 되지 않고서 후생할 수 있는 이는 드물지니,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다면 어찌 그 마음을 바로 지닐 수 있으리요(p.197)” 라는 명제에서 기인한다. 보통 우리는 실학이라고 하면 성리학을 부정하거나 또는 성리학에 대한 반동으로 실학이 생겨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박지원이 성리학을 완전히 부정하는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유학자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입장에서 성리학의 모순과 불합리한 점을 비판하고 이것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 논쟁거리로 등장한 데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였고, 청나라의 과학적 문물과 합리적 학문 태도를 받아들여 점진적인 개혁을 도모하려는 현실주의자였다. 조선이 중화문화의 유일한 계승자라는 소중화 사상과 주자 성리학에 사로잡힌 선비들이 청을 오랑캐라며 인정하지 않은 것에 반하여 박지원을 비롯한 실학자들은 주자성리학을 계승하면서도 시대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다. 이것이 이른바 ‘북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북학에 대한 박지원의 입장을 보면, “대개 천하를 위하여 일하는 자는 진실로 인민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될 일이라면, 그 법이 비록 이(夷),적(狄)에게서 나온 것일지라도 이를 거두어서 본받아야 하거늘(p.289)"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그러므로 이제 사람들이 진실로 오랑캐를 물리치려면 중화의 끼친 법을 모조리 배워 밭갈기, 누에치기, 그릇굽기, 풀무불기 등으로부터 공업,상업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미쳐 먼저 우리 인민들을 이롭게 한 다음, 그들로 하여금 채찍을 마련해 두었다가 저들의 굳은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를 매질할 수 있도록 한 연후에야 중국에는 아무런 장관이 없더라고 이를 수 있겠다.(p.289)“라고 하니 가히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비록 청의 문명이 오랑캐의 문명이라 할지라도 백성들의 생활부터 이롭게 해야한다고 생각했던 그였기에 그의 관심은 벽돌, 가마, 온돌에서 시작하여 수레, 말로 이동한다. 백성의 삶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던 박지원. 이러한 그의 모습에서 진정한 지식인은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지식인이란 자신이 앎을 개인의 학문이나 만족에서 그치지 않고 그 앎을 사회, 이웃과 나누는 것이 아닐까?

  

  책을 덮으며  

 

  연암 박지원은 고문을 반박하면서 참다운 문학의 질은 이미 화석화되어 버린 옛말과 경험을 답습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진정한 의미를 음미하면서 자신의 시대와 경험에 충실하는 데 있을 따름이라고 주장했다. 연암에 있어서 풍자란 중세적 봉건사회가 무너져 가고 그 속에서 새로운 사회의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하는 역사적 변화의 시대에 살면서 그 모든 추이들을 직시했던 비판적 태도로 나타난다. 또한, 그는 서민들의 삶의 세계를 향하여 새로운 의식 세계를 확장하면서 당대 평민층의 삶과 모습을 생생하게 포착하는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뛰어난 소설적 성과를 이룩했다.

 

※ 이 책을 읽고 더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한 책

<나의 아버지, 박지원> <책에 미친 바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