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읽을 책을 고를 때

매우 건설적이며 알찬 내용의 책을 일부러 찾는 편인데요.

 

몇일 전엔 그냥

마음을 잔잔하게 해 줄 자그만한 그 무언가가 필요했어요.

거창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애틋함과 감동을 느끼고 싶은 맘에

요 책을 고르게 되었답니다.

 

이 수필집 제목이 이 책을 고르게 한데 한 몫을 했죠.

사소한 무언가 하지만 

'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그래. 난 그런게 필요해.

  

대여한 책이 집에 배달되자마자

흠;; 이 책을 어디서 읽으면 딱일까? 하고 고민하다가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있는 베스킨라빈스로 달려갔어요.

마침 햇살이 스며드는 창가 자리가 비었길래

얏호~하고 자리를 잡고

제가 사랑하는 체리쥬빌레를 시킨 뒤

의자에 털~썩 앉아

  이 한 권을 다 읽어버렸습니당

ㅋㅋ  

아이스크림 집에서도 이렇게 오래 앉아 있는 사람 있나요? ㅎㅎ 

 

작가 '에쿠니 가오리'씨가 한국서 꽤 유명하다더군요.

냉정과 열정사이(?)라는 책을 쓰신 분이라고..영화로 나왔다던데..

전 요번에 첨 알았지만;;

 

얼핏보면 지은이가 별다른 의미없이

일상에서 느낀 아주 사소한 것들을 나열해 놓은 것 같은데요.

 

하지만

평소 저 자신도 느꼈지만 딱 꼬집어서 말할 수 없었던 그런 느낌들을

잘 표현해 놓은 잔잔한 글들입니다.

 

격한 감동의 물결이라던가 '그래 이거야!'와 같은 걸 원한다면

이 책에 실망하실 거고요.

뭐랄까.. 가난한 행복(?) 같은 걸 느끼고 싶은 분께 권해드려요.

 

"작은 것들에 쏟아지는 애틋함과

작은 것들마저 놓치지 않는 늘 깨어 있는 의식과

새로운 의미를 탄생케 하는 애정 어린 숨결을 느끼는 즐거움이며

그녀의 일상을 엿보는 동시에,

그런 것들이 그녀의 작품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알게 되는,

그런 즐거움..."

 

그리하야

 제 맘을 왠지 모르게 뭉클하게 했던 글들 중 핵심 글귀들을 몇개 기록해 두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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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무줄  

 

별다른 이유 없이 좋아하는 것 중에 고무줄이 있다.

왜인지는 모른다. 실용적이고 견실한 겉모양에 끌리는 것이리라.

그 색, 그 독특한 촉감, 그리고 그 소박한 모양새.

....

늘 어디에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정작 써야겠다 싶을 때 손이 닿는 곳에 없으면,

나는 큰 실수를 저지른 듯한 기분에 젖는다.

....

그래서 찍 늘어나거나 말라 비틀어진 고무줄을 보면 슬프다.

실로 서글픈 광경이다.

그런데도 할 일을 다하고 생을 마감했다는 장인 정신 같은 꼿꼿함이 엿보여 매력적이다.

지금도 부엌에서 그런 고무줄의 시신을 보면,

나는 경건한 마음이 든다.

 트라이앵글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트라이앵글에 친근감을 품고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음악 발표회에서 트라이앵글을 맡은 이후로 줄곧 그렇다.

나는 겨우 여덟 살짜리 꼬마였지만 금방 알았다.

그 악기와 내가 성격이 잘 맞는다는 것을.

....

쨍, 하는 투명한 소리의 아름다움과 딱딱한 느낌.

나머지 악기들과는 전혀 다른 장소에 홀로 동그마니 있는 것처럼,

고립된 입장이랄까,

또는 소극적인 고집스러움.

 

트라이앵글은 불안한 마음으로 치면 정말 불안한 소리가 난다.

내 악기다.

그렇게 생각한다.

 리본  

 

리본으로 머리를 묶어 어울릴 나이는 오래전에 지났는데도 리본을 잔뜩 갖고 있다.

상자 하나 가득한 그것은 거의 쓰이는 일 없이 몇 년이나 마냥 담겨만 있는데,

한 개도 늙지 않았다.

뚜껑을 여는 순간 꺄르르 웃음소리가 들려올 듯하다.

....

손가락에서 스르륵 미끄러질 때의, 또는 휘감길 때의 싸늘한 감촉과 묶을 때 나는 소리.

아주 잠깐, 숨을 멈춘다. 시간을 멈추게 하려는 듯이.

....

리본에는 음영이 있다.

묶었을 때는 공기를 품고 입체적으로 존재하다가

풀면 이내 하나의 긴 천으로 돌아가는,

그 찰나적인 존재 양식.

 

묶고 풀 수 없는 리본은 재미없다. 긴장감과 기개가 없다.

 

무뉘여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무뉘로 하다니, 몰상식하다.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리본이야말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누    

 

비누를 물에 적셔 두 손으로 마주 잡고 쓱싹쓱싹 비빈다.

그 때 손바닥 안에서 비누가 미끄러지는 감촉은

거의 관능적이라 할 만큼 사랑스럽다.

거품이 보글보글 일고,

그 거품이 공기를 머금어 향내를 풍기면 손에서 넘쳐 흐르는 정경.

 

비누의 모양은 더없이 단순하고 가련하다.

모두 말이 없고 얌전하다.

나는 지금껏 말 많은 비누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녹아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