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김수영 시인이 ‘VOGUE야’를 발표하던 당시는 많은 이들이 하루하루 삶을 연명하는 것조차 힘겨웠던 시기다. 가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허공을 향한 의미 없는 몸짓은 언제나 제자리만을 향할 뿐이었다. 비니루 장판에 구공탄이 탄 자국, 구두에 묻은 흙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벗어버리고 싶은 남루한 옷이었다. 이러한 시대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잡지 <VOGUE>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을 사치스러운 화려함으로 휘감고 유혹의 손길을 보낸다. 타인의 부러움 섞인 시선을 즐기는 현대 여성들은 오늘도 그 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아우성이다. 그렇게 <VOGUE>에 담긴 세계는 여성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한 여자가 있다. 김지수 작가. 그녀는 VOGUE의 10년 차 피처 에디터다. 시인을 꿈꾸었던 소녀는 이제 누구보다 유행에 민감하고, 언제나 스타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어른이 되었다. 사치가 곧 신분을 드러내는 현대인의 삶 속에서 김지수 작가는 <시, 나의 가장 가난한 사치>를 통해 현대의 진정한 사치는 ‘시’가 될 것임을 강조한다. 물질은 소멸하지만, 시는 영원하다. 마놀로 블라닉 구두를 신고, 샤넬 백을 매는 것보다 김수영의 산문집 <시여! 침을 뱉어라>를 손에 쥔 여자가 진정 사치를 누리는 시대가 왔다고 말이다.

<시, 나의 가장 가난한 사치>에는 우리 삶 속에서 마주하는 생의 순간들을 포착한 시 50편이 담겨 있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어스름한 새벽부터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는 어둠이 내린 깊은 밤까지, 일상 속에서 시가 어우러지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기록을 들려준다. 현대인의 우상 VOGUE 속에서 맨발로 걸어 나와 시가 주는 사치스러움을 마음껏 누리라고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시, 나의 가장 가난한 사치>는 <품위 있게 사는 법>, <나를 힘껏 끌어안았다>, <나는 왜 이 도시에 남겨졌을까>에 이은 김지수 작가의 네 번째 책이다. 전작에 이어 이번 책에 이르기까지 김지수 작가의 책들은 어딘지 모르게 서로 닮아 있다. “책을 출간할 때마다 나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진화의 단계를 밟아가고 있어요.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담아내려고 하죠. 하지만 근본적으로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나 사람을 보는 시각은 같아요. 아름답거나 혹은 눈물겹죠.”

책 속에 깔린 근본적인 기저는 같았지만 네 권의 책을 출간하면서 그녀는 조금씩 달라졌다. “세상 밖에 내놓은 책들을 돌아보면서 생각했어요. 뭐가 달라졌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조사가 달라졌더라고요. <나를 힘껏 끌어안았다>의 조사는 ‘나를’, <나는 왜 이 도시에 남겨졌을까>는 ‘나는’, <시, 나의 가장 가난한 사치>에서 조사는 ‘나의’예요. 목적어에서 주어, 그리고 소유형으로 넘어온 거죠.” 타인의 뒤에 숨어서 이야기하던 그녀가 점점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나를 힘껏 끌어안아주었다>는 나를 안아준 누군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그들의 뒤에 숨어서, 그들에 의해 규정지어진 내가 존재하는 책이죠. <나는 왜 이 도시에 남겨졌을까>는 처음으로 나라는 주체가 세상으로 삐쭉 얼굴을 내밀면서, 나 이런 사람이에요, 라고 말을 걸어요. 그리고 <시, 나의 가장 가난한 사치>는 본격적으로 내 이야기를 하면서 좀 더 적극적으로 나라를 존재를 드러내고 있죠.”

<시, 나의 가장 가난한 사치>는 그렇게 ‘시’라는 커다란 사치를 통해 세상 밖에서 맴돌던 그녀를 세상 속으로 들어오게 했다. 이 책에서 김지수 작가는 이제 명품이 아닌 시가 사치인 시대가 왔다고 말한다. “조선시대 문인들에게 가장 큰 사치는 시였어요. 뱃놀이를 하면서 시문을 짓고 서로 경합을 벌였죠.” 평범한 사람들은 꿈도 꿀 수 없었던 사치스러운 시의 권위는 이제 물질만이 최고임을 떠들어대는 현대문명 앞에서 갈 곳을 잃고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물질은 지금 이순간에도 끊임없이 소비되고 있어요. 오늘은 이게 유행이었다가 내일은 또 다른 게 유행이 되죠. 마치 그 순간만큼은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떠들어대지만 모두 사라지는 거품처럼 그 순간일 뿐이에요.”

그녀가 속한 공간인 <VOGUE>는 다른 어떤 곳보다 가장 물질적이고 소비적인 공간이다. “언제든 지금의 가치가 소멸되고 부정 당하는 곳, 그곳이 바로 패션계이고, 보그에요. 그래야 사람들이 지금의 유행을 부정하고 또 다른 소비를 하기 때문이죠. 옷이든 가방이든 신발이든 모든 사치적인 것을 들고 허세를 부려야 나라는 사람이 돋보여지고, 존재감이 인정되는 공간이에요.” 하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중요한 정신적인 사치를 부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책의 표지를 장식한 한 장의 사진, 무장해제한 느낌의 맨발의 사진을 표지에 넣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우리를 둘러싼 사치란 것은 너무나 허무한 것이에요. 진정한 사치란 끝없이 고갈되고 소비되는 게 아니라, 사치를 통해 충족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해요. 그런 충족감을 채워줄 수 있는 게 바로 시가 아닐까요. 시는 자신의 영혼을 계속 확장시키고 자기 삶의 스토리텔링을 높여줘요. 그래서 현대사회에서 진정한 사치란 시가 아닐까 생각해요.”

책은 총 3부분으로 이루어진다. 1부 ‘사람이라는 벽 안의… 아름다운 풍경’, 2부 ‘산다는 것은 곧 생의 무게를 지탱하며… 제 무덤까지 걸어가는 것’, 3부 ‘어찌할 바를 몰라도… 또 어찌어찌 살아내는 것’까지. 이 속에 소개된 시들을 통해 그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결국 ‘인생’이었다. “<나를 힘껏 끌어안았다>는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구성되어 있어요. 누구에게나 인생은 봄 아니면 여름, 가을 아니면 겨울이잖아요. 이번 책도 마찬가지로 소개된 시들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저마다 다르지만 결국 생에 관한 어떤 한 장면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시라는 게 결국은 사람의, 인생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거니까요.”

정윤천 시인의 ‘천천히 와’를 시작으로 이우걸 시인의 ‘종점’으로 끝을 내는 이 책은 마치 시에게 말을 거는 것만 같다. 천천히 내 삶 속으로 들어와 삶의 종점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생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시는 김지수 작가의 고단한 일상을 다정하게 위로해주고, 다독여줬다. 감동의 순간을 함께한 수많은 시들 중에서 50편의 시를 고르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다. “좋은 시들이 너무 많아서 어떤 시를 소개하면 좋을까 고민이 많았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뭘까, 거기에 어울리는 시가 뭘까를 생각해보니 최대한 생활적인 시들을 고르게 되더라고요. 너무 관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시나 미래파적인 내용을 담은 시는 넣지 않았어요.” 시를 통해 독자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는 그녀였지만, 처음에는 시와 겨뤄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처음엔 시를 이겨보고 싶었어요. 해석하려고 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원하던 건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시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 그게 바로 내가 원하던 거였어요.”

그녀는 인터뷰 시 종종 인터뷰이에게 시를 낭송해준다. 배우 이정재를 인터뷰할 때에는 정호승 시인의 ‘벽’이라는 시를 낭송하며 ‘당신은 벽 앞에서 어떤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김지수 작가는 벽 앞에서 어떤 사람일까. “예전에는 정복의 욕구가 강했어요. 어떻게든 타고 넘으려고 했죠. 벽만 보면 아, 저거 내가 넘어야 하는 산이구나, 모든 장비를 동원해서라도 넘고야 말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이제 그녀는 벽이란 단지 쉬어야 할 하나의 쉼표로 여겨질 뿐이라고 했다. “언젠가부터 벽은 내게 잠깐 스톱, 쉬어, 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벽 앞에 필요한 건 정과 망치가 아니에요. 정호승 시인의 말처럼, 어루만지거나, 쓰다듬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해요.”

김지수 작가에게 시는 어린 시절을 함께한 추억이었고, 꿈이었으며, 동경이었다. 10대를 지나 어느덧 40대, 한 남자의 아내, 한 아이의 엄마가 되기까지 그녀의 삶 속에서 시는 의미를 달리하며 언제나 함께했다. “10대에는 언어라는 생명체가 가진 것에 대한 설렘이나 경이로움이 컸던 것 같아요. 뭐랄까…. 뇌가 언어를 향해서 열리는 상태라고 할까요? 어릴 적에 제 친구가 ‘길’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썼는데 ‘길은 별을 보아야 한다.’라는 구절이 있었어요. 그때 굉장히 충격적이었죠. 어떻게 저런 표현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때는 언어가 서로 부딪혀서 만들어내는 새로움에 감탄하고 놀랐던 것 같아요. 20대, 30대는 글쎄요. 10대 때 생각하고 썼던 것들이 더 진짜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방황과 안정 사이에서 끊임없는 외줄타기를 이어갔던 당시를 회상하며 그녀는 ‘그리움’이라 말했다. “10대 때 알게 된 놀라운 비밀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것만 같았어요. 이루어지지 못한, 헤어진 첫사랑을 그리워하는 심정이라고 할까요. 당시에 난 해야 할 일들이 많았어요. 방황도 해야 했고, 직업도 가져야 했고, 사회적으로 성공도 이루어야 했으니까요.” 환희에 가득 찼던 10대, 애잔한 눈빛으로 그리워했던 20대, 30대를 지나고 40대를 맞이한 어느 날, 그녀는 문득 두려워졌다. “한탄이 나오더라고요. 아, 나는 이제 다시는 시를 쓰지 못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녀는 자신이 쓴 인터뷰나 칼럼이 한 편의 시처럼 읽히길 바랐다. 그러다 ‘시 읽어주는 여자’라 되어달라는 제안을 받게 됐다. 한 아이의 탄생을 지켜보면서 시적 영감이 충만해졌던 그녀에게 더 없이 좋은 기회가 되었다.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어요. 하지만 첫 문장을 쓰지 못했죠. 그러다 좋은 제안을 받았고, 책을 내게 된 거예요. 엄마가 되면서 세계관이 많이 달라졌어요. 내가 아이를 낳았다는 게, 그 자체로 굉장히 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몸 안에서 생명이 만들어지고, 그 생명이 훅, 하고 떨어져 나와 자생적인 생명력을 갖는 게 신기했죠. 이 것 자체가 하나의 시이고, 내가 시로부터 멀리 떨어져오지는 않았구나, 안심하게 됐어요.”

십 년이 넘게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글을 썼다. 짧지 않은 시간,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권태 속에서 그녀는 늘 새로운 도전과 매너리즘 사이를 오간다고 했다. “가장 객관적인 글을 써보고 싶어요. 과거의 나는 글 속에 굉장히 많은 개입을 하면서 그 사람을 연기했거든요. 이젠 마치 내가 그 사람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드라이하게 표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때로는 모놀로그 식으로도 썼다가, 때로는 착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담았다가 또 때로는 깊숙이 파고드는 날카로운 글을 쓰기도 하고,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동일했지만, 표현하는 방식은 언제나 새로웠다. 

그렇다면 시는 어떨까. 어떤 시를 쓰고 싶냐는 물음에 김지수 작가는 ‘아이 같은’ 시를 쓰고 싶다고 했다. “굉장히 동시 같은 느낌의 시를 쓰고 싶어요. 이것저것 고민하고, 계산하고, 억지로 짜내지 않은 아주 담백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가랑비에 옷이 젖듯 스르르 다가가서 어느새 마음을 적시는 아주 단순한 문장이었으면 좋겠어요. 주어, 목적어, 서술어 정도로만 구성된 조미료가 많이 들어가지 않은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 좋은 생선을 그대로 맑게 끓여낸 느낌이라고 할까요.”

<시, 나의 가장 가난한 사치>의 프롤로그를 통해 ‘에디터란 세상의 온갖 이야기를 전달하는 문장의 통로가 되어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시인이란 세상의 아픔을 대신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토씨 하나를 찾아서 천지를 헤매는 사람이라고 하잖아요. 내가 생각하는 시는 그래요. 가장 하찮은 것들을 향해 굉장한 애정을 담는 것. 하찮고 아무렇지 않은 것에 애정을 쏟는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는 시의 한 구절처럼, 시는, 그리고 시인은 세상의 아픔, 환부를 대신 앓아주는 사람이 아닐까요.” 

“시가 하나의 유행가처럼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으면 좋겠어요. 편안한 술자리에서 흥에 겨운 기분을 시로 표현할 수 있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갔으면 좋겠어요. 하나의 응원가처럼 힘이 되어주기도 하고요.” 서정주 시인의 애제자, 그의 시심을 그대로 물려받은 문정희 시인을 누구보다 좋아하는 사람. 김지수 작가는 일상어가 곧 시어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고은 시인이 <만인보>를 쓴 것처럼, 자신이 인터뷰한 사람들을 하나의 시로 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오늘도 <VOGUE>에서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시로 쓴다. <시, 나의 가장 가난한 사치>를 통해 시와 함께 자신을 드러낸 김지수 작가. 시 읽어주는 여자, 20년간 시를 쓰지 못한 시인이 아닌, 진짜 시인으로 그녀를 마주할 날을 기다려본다. 

“삶은 매 순간 무언가를 잉태해요. 시를 품는 마음이 생기면서 지금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 사람을 어떻게 내 마음에 품고, 어떤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곤 해요. 요즘은 엄마가 되면서 아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답니다. 저 아이가 내일은 어떻게 자랄까, 또 내일은 어떤 모습일까… 나날이 새롭게 그 다음날이 또 다음 날을 잉태하고, 오늘은 내일을 잉태하죠. 날마다 새롭다는 것, 우수의 성실함을 지금 이순간에도 느끼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