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만 이책을 접하기 전까지만 해도 장기려 선생에 대해 알지 못했다. 존함은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듯도 한데 어디서 들었는지, 어떤 분이신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책을 읽는 동안에도 깜깜했던 기억이 책의 말미, 그러니깐 부산에 정착하신 이후부터 조용히 눈을 감으실 때까지 그분이 남겨놓으신 업적들을 간략히 정리해둔 에필로그의 내용에 이르러서야 번쩍하고 떠올랐다.

예전에 티비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다큐멘터리를 본적이 있다. 부산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진료소를 설치해 무료로 진료를 해주고 평생동안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며 봉사하셨던 한 의사 선생님의 흔적을 더듬어가던 다큐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분이 바로 장기려 선생이셨던 것 같다.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성자로 불리셨던 그분의 행적을 다큐를 따라 더듬어가면서 저렇게 온전히 타인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것에 진한 존경심을 가졌었는데 그분이 바로 이분이셨다니! 책을 통해 받았던 감동에 또다른 기억이 더해져 감동을 깊이를 더해갔다.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장기려는 송도고보를 거쳐 경성의전에 입학해 의사로서의 길을 시작한다. 격동의 시절 미래로의 뚜렷한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그는 자신의 인생길에 확고한 목표를 세우고 달려가는 선배 석주명, 가난 때문에 어머니의 죽음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친구 김주필, 그의 앞길에 대해 진심어린 충고를 해준 종기의 박 의원 등과의 만남과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나눔의 진정한 의미를 새겨준 할머니를 떠올리며 의사가 될 것을 결심하고 경성의전에 입학한다.

스승 백인제의 가르침속에 진심으로 환자를 대하며 실력과 명성을 쌓아가던 장기려는 경성의전의 교수직을 물려주려는 스승의 제의와 의사라는 직업을 이용해 부와 명예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모두 마다한 채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는 송도고보 시절의 서원을 지키기 위해 경성을 떠난다. 그리고 스승이 소개해준 평양의 연합기독병원에서 새로운 시작을 한다. 장기려는 바쁜 병원업무속에서도 빈민촌을 돌아보며 무의촌 진료를 시작했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팔을 걷어부쳤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아내는 그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꿈에도 그리던 해방을 맞았으나 기쁨에 젖었던 나라는 곧 분열되었고 다시 3ㆍ8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갈렸다. 전쟁이 터졌고 평양은 그대로였지만 그곳을 점령하는 이념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를 오갔다. 그런 혼돈 속에서도 장기려는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지켰고, 오직 ’생명’을 최우선으로 하는 의사로서 환자들을 대했다. 그러나 그 시대를 뒤덮던 고통에서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잠시를 기약하며 차남과 함께 올랐던 피난길은 그대로 가족들과 생이별이 되었다. 

망연자실하던 장기려는 의사의 손길을 기다리는 피난민들이 들끓는 부산에서 다시 자신의 서원을 떠올렸고, 어느새 의사로 돌아왔다. 진료소를 세운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해 주었고, 무의촌 진료도 계속했다. 일제강점기 기홀병원 재직시에 일본에서도 성공하지 못했던 간 설상절제수술을 처음으로 성공했던 그는 해방후 우리나라 최초로 간 대량절제수술에 성공했고, 우리나라 의료보험의 효시인 청십자 의료보합조합을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의 진료 부담을 낮춰주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들을 이용해 개인의 성공이나 이익, 명예를 좇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낮은 곳으로 임했고, 늘 병든 환자들과 함께 했다. 


<청년의사 장기려>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청년 장기려의 삶을 들여다본다. 의사로의 길을 결정하고 기도로 맹세하던 송도고등보통학교시절에서부터 백인제 박사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경성의전, 낮은 자리로 임해 나눔을 실천했던 기홀병원(연합기독병원), 해방과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혼란스러웠던 시기와 피난길에 올라 부산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을 담담하게 펼쳐보인다. 작가는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성인이라는 찬사를 받는 장기려 선생을 과장하거나 영웅적인 인물로 그려내지 않는다. 아픈 시대를 살아야 했던 한 사람으로서 고뇌와 번민을 하는 모습을 통해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그와 함께 어떤 위협에도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꺾지 않는 담대함과 돈이나 권력 앞에서도 ’생명’을 가장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의사로서의 강직함도 보여준다.

의사는 여전히 각광받는 직업이지만 예전처럼 존경을 받지는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것은 이미 사람을 살리는 숭고한 직업이라기 보다는 고수익과 사회적 지위를 주는 직업 중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생명에 대한 소명의식보다 환자를 자신의 배를 불리는 돈으로 생각하는 의사들을 적지않게 만날 수 있다. 생명보다 물질이 최우선되는 사회,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게 현실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아직 우리 곁에는 장기려 선생같은 천사들이 남아있다. 비록 그처럼 모든 것을 바쳐 희생하고 봉사하진 못할지라도 각자의 범위에서 최선을 다해 나누는 수많은 장기려들이 있기에 이 세상은 아직 살만할 것일 게다. 


이책을 통해 ’작은 예수’, ’한국의 슈바이처’라는 애칭이 부끄럽지 않은 ’살아있는 성자’ 장기려 선생을 만날 수 있어 너무 행복했다.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의연하게 지켜냈고, 평생동안 타인을 위해 베풀며 살았던 그분의 삶은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동시에 우리와 동시대를 살다가신 이런 훌륭한 분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마지막까지 나누고 봉사하는 삶을 실천했던 장기려 선생의 숭고한 정신이 이책 <청년의사 장기려>를 통해 보다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기를, 그래서 그분을 닮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더욱더 많아지기를 바라본다.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작가가 추천한 평전 <장기려, 그 사람>도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읽어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