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밀레니엄 1]에 대한 기대치는 평균 이하였다.
자못 촌스러운 표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책의 앞뒤에 빼곡히 적힌 거창한 찬사가 퍽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마치 남는 거 하나 없다는 장사치들의 뻔하디 뻔한 거짓 상술을 보는 느낌이랄까.
그러나 이러한 선입견과는 달리 [밀레니엄 1]을 정의하는 화려한 수식어에 결코 과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기자 출신답게 저자의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글 솜씨는 일품이었으며, 뚜렷한 기승전결을 바탕으로 한 소설적 구성과 전개는 작가로서의 기본기에 무척이나 충실했다.

특히나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의 개성은 여타 작품에 비해 너무도 잘 표현되어있다.
눈 하나 깜짝 않고 수십 명을 학살한 이가 별것도 아닌 인물 앞에서 인간의 존엄을 얘기하고 또 고뇌하는, 이런 빌어먹을 캐릭터를 묘사하는 작가가 어디 한둘이던가.
천재임을 표방하면서도 오히려 평범한 이들보다 우매하거나, 작품 내내 근엄하고 무뚝뚝하던 남성이 아무런 이유 없이 뭇 여성 앞에서 조잘대며 촐싹대는 모습을 그리는 작가의 수는 또 얼마나 많은가.

[밀레니엄 1]에서는 결코 이러한 함량미달의 캐릭터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타고난 정의감과 저널리즘으로 무장된, 그러면서 냉철하고 명석한 낭만주의자 미카엘 블롬크비스트. 막강한 부를 지는 대기업 총수이자, 사랑하는 가족의 정에 목말라하는 노신사 헨리크 반예르. 불우한 성장기를 겪어 더는 현실의 어른을 믿지 못해 방황하고 탈선하는 천재 해커 리스베트 살란데르. 그 외 여러 인물의 뚜렷한 개성, 혹은 이중적인 내면까지…….
등장인물이 살아있으면 작품은 생명을 얻고, 이에 독자는 열광한다. 너무도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아울러 저자는 물 흐르듯 유연한 전개로 작품의 질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미카엘은 재계 권력자인 베네스트룀과의 소송에서 패함으로써, 헨리크로부터 이른바 ‘하리에트 실종사건’을 의뢰 받는 결정적 ‘동기’를 갖게 된다.
이에 미카엘은 당시의 사진을 통해 단서를 포착하고 주변인물의 정황을 낱낱이 조사하면서 생생한 수사 ‘과정’을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한다.
더욱이 능력의 한계에 부딪힌 미카엘이 조력자 리스베트를 만나게 되면서 사건의 ‘진실’에 한 발짝 다가가는 전체적인 구성은 독자로 하여금 좀더 현실감 있는 추리를 만끽할 수 있게 한다.
‘동기’가 명확하고, ‘과정’은 옹골차며, ‘진실’은 현실적이다.
그럼에도 재미가 없다면 이는 순전히 독자의 독특한 취향 탓이라 봐도 무방하리라.

[밀레니엄 1]은 비단 한 인물의 실종에 관해서만 다룬 작품은 아니다.
탐욕에 물든 재벌의 공공연한 비리를 비롯해, 언론이 갖는 힘과 그에 따른 책임, 무엇보다 인간 내면의 추악하고도 가학적인 성향과 이로 인해 고통 받는 이 시대 수많은 약자-특히 여성-의 실상을 가감 없이 서술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잔악함의 수위를 적절히 조율한 점, 간혹 등장하는 성애의 묘사가 지나치지 않은 점, 정보통신에 관한 전문지식을 적재적소에 가미하고 이를 쉽게 해설한 점 등은 저자의 문학적 재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저자가 두 주인공 미카엘과 리스베트에게 부여한 능력이 범상치 않음을 넘어 여타 인물에 비해 너무 뛰어나단 것이다.
물론, 주인공의 능력이 평범하다면 작품의 긴장감과 재미를 감소시킬 수 있겠지만, 이 둘이 함께 사건을 해결해 나가면서 난제는 술술 풀리고, 대기업의 막강한 사회적 권력 역시 맥을 못 춘다. 세심하고 명석한 사고력을 지닌 미카엘과 여기에 천재 해커 리스베트가 가세했으니, 지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거칠 것이 없는 셈이다.
이러한 설정을 조금 완화시켰다면 좀더 아슬아슬한 상황과 긴장이 빚어내는 깜짝 재미를 독자에게 선사할 수 있지 않았을까? 못내 아쉽다.

음식에도 제철이 있듯, 책에도 저마다의 시기가 존재한다.
모름지기 여름은 추리와 스릴러가 풍성한 계절이다. 올 여름, 참 많고도 많은 추리소설을 읽었지만 별반 눈에 띄는 작품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여름의 끝물에 별 기대 없이 선택한 [밀레니엄 1]은, 실망을 금치 못한 올 한해 추리 문학계에 대한 감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전과목 0점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과목에서 100점을 맞았을 때의 희열이 이와 같을까? 다소 부족하긴 하나, 이 정도 성적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흔히 말하는 유종의 미는 나름대로 거둔 셈일 테니.
그저 뙤약볕이 쨍쨍 내리쬐던 이번 여름을 [밀레니엄 1]과 함께 하지 못한 자책만이 한없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