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 드라마 셜록 홈즈를 보고 당장 빌려온 책.

사실 당장은 아니고 다 대출중이어서 예약을 걸었다가 도서관이 불러주셔서 겸손하게 두 손으로 받아왔다.

셜록홈즈라면 어릴적에 강아지 캐릭터가 홈즈와 왓슨으로 나오는 만화시리즈 밖에 본 적이 없어서 배경지식 전무한 상태로 읽었는데 어우, 됴타 됴타.

책의 영양가나 완성도는 차치하고 일단 월매나 재미있는 책인가를 보려면 내가 책을 읽는 행태를 살펴보면 된다.

지하철에 타면 읽고 내릴 때가 되면 접고 내리는 녀석

지하철에 타면 읽고 읽다가 조는 녀석(퇴근시)

심하게 졸다가 책 떨어뜨리는 녀석

지하철에 타서 읽었는데 읽다가 내릴 역을 지나치는 녀석(퇴근시)

지하철에 타서 읽었는데 우리 동네에 내려서 어두운 가로등불 아래서라도 한줄이라도 더 읽으려고 안달하는 녀석(퇴근시)

지하철에 타서 읽었는데 회사 올라가는 길까지 계속 읽다가 역에서 회사 가기까지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주차방지용 기둥에 걸려 넘어질 뻔한 녀석(출근시)

집에 와서도 계속 생각나서 애들 방치하고 읽는 녀석

등등

이 책은 걸려 넘어질 뻔한 녀석 되시겠다.

드라마의 캐릭터가 너무 멋져서 도저히 원작도 못 따라갈거야. 그만큼 재미는 없을거야, 라고 마음의 무장을 하고 봤는데도 재미있다.

아니, 그런데도 재미있다가 아니라 원작이 너무 훌륭하다. 2002년에 다시 번역한 것임에도 '~했소'라는 어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1800년대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 그랬을 거라고 이해해 주기로 하자. 그래서 급, 이렇게 훌륭한 원작은, 그 맛을 드라마나 영화로 제대~로 옮겨오는 것 자체가 관건이라는 쪽으로 의견을 수정한다.

드라마의 １편 [A Study in pink]을 보고 원작의 '주홍색 연구'[A study in scarlet]에서 차용한 거라고 하던데 정말 그랬다.

사실 소설 한 편을 드라마로 충실히 재현한다는 것은 무리다. 문제는 얼마나 살릴 곳을 살리고 버릴 것을 버리면서도 그 자체로 완결적으로 만드느냐일텐데 분홍색 연구를 보고 확 넘어간 상태에서 본 원작이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의 완결성이나 살인자에게 부여한 범죄 동기 같은 면은 소설쪽이 훨씬 풍성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제목만 봐도 pink는 죽은 여자가 입은 옷이 분홍색이라는 것 말고는 극 전체를 아우르는 의미가 없지만 주홍색 연구는 죄를 의미하는(주홍글씨) 색깔이 가진 의미를 따옴으로써 범죄에 대한 연구라는, 셜록 홈즈 삶의 화두를 나타내고 있다. 물론 드라마쪽도 끼워 맞추자면 분홍옷을 입은 여자의 직업, 출발지, (현장에는 없는) 깔맞춤 가방이 있을 것이라는 등의 홈즈의 추론 능력을 선보이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드라마만 봤을 때는 그것만으로도 스터디 맞군, 하고 납득했었다.

2권은 지금 읽는 중이고, 3,4,5권도 줄줄이 예약을 걸어두었으니 아직 다 보지 못한 BBC의 셜록홈즈 드라마를 볼 때 어디서 어떤 이야기를 차용했는지 줄긋기하는 재미가 쏠쏠할 듯하다.

셜록홈즈가 아무리 살인자를 찾아내는데 일등공신이라 해도 신문에서는 오직 형사들의 공만 치하하는 결과가 되자 왓슨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실을 죄다 일기에 적어 놓았으니 앞으로 그것을 대중에게 공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는 로마의 구두쇠처럼 자신의 성취를 스스로 자각하는 정도에서 만족해야 하겠군요. <사람들이 나를 보고 비웃을지라도 궤짝에 쌓인 돈을 볼 때, 내 마음은 뿌듯하도다.>(고대 로마의 시인 퀸투스 호라티우스의 말-옮긴이 

이것이 이 재밌는 시리즈를 앞으로 8권이나 더 읽을 수 있다는 흐뭇함에 젖은 지금 내 마음과 꼭 같구나.

<사람들이 나를 보고 비웃을지라도 예약을 걸어둔 셜록홈즈 전집 목록을 볼 때, 내 마음은 뿌듯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