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보기| 전체(3414)

아뿔싸 하면서도 주저했다. 만개(滿開)한 꽃구경을 하려면 만장(滿場)한 인파가 만당(滿堂)한 길을 뚫어야 했다. 과연 경북 안동 가는 길이 평소보다 1시간 이상 더 걸렸다. 이틀 전 갔던 길을 다시 밟아야 했던 지난 주말, 둔한 기자가 했던 고민이다.

하회(河回)마을 낙동강 뚝방길 500m를 물들인 벚꽃은 그새 더 하얘졌다. 그런데 반대편 부용대(芙蓉臺) 밑 옥연정사는 여전히 썰렁했다. 50m 남짓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사람들이 들끓는데 반대쪽은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던 것이다.

옥연정사라는 이름에는 설명이 필요하다. '구슬 옥(玉), 못 연(淵)'. 낙동강은 특이하게 이 부근이 깊고 푸르다. 그 옆100평 터 세 칸 한옥 중 한 곳에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책을 썼다. 최근 TV 드라마로 방영되는 '징비록(懲毖錄)'이다.

서애가 쓴 '징비'라는 책 제목은 시경(詩經)에 나오는 문장을 압축한 것이다. '예기징이비역환(豫其懲而毖役患)',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서애는 무엇을 예감했는지 이 집을 임진왜란 일어나기 6년 전에 짓기 시작했다. 그런데 돈이 모자라 멈춘 공사를 승려 탄홍(誕弘)이 도왔다고 한다. 장삼이사(張三李四)가 모아준 시줏돈을 10년간 가져다 바친 것이다. 그렇게 만든 집에서 쓴 징비록이 국보 132호가 됐으니 책 한 권에 서애와 스님과 민중의 공력이 담겨 있을 것이다.

기자는 서애가 징비록을 쓴 원락재(遠樂齋) 내부를 확인하지 못해 다시 보러 갔는데 처음 본 15대 종부(宗婦)는 "찾는 이는 별로 없는데 어제(금요일) 일본의 15대 심수관이 한 배우와 한옥스테이를 했다. 드라마 '징비록'을 보고 왔다더라"고 전하는 것이었다. 우연인가 싶었는데 옥연정사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병산서원의 텅 빈 마당에서 확신을 얻었다. 한 관리인은 "드라마 '징비록' 때문에 이곳에 관심이 몰리겠다"고 말을 건네자 이렇게 답하는 게 아닌가. "사진동호회 사람들만 잔뜩 몰려옵니다." 전국에서 백일홍이 가장 화려하게 핀다는 이 서원, 후학들이 서애를 기리기 위해 세운 터에는 올여름 서애의 깊은 뜻보다는 화려한 꽃의 자태를 필사적으로 카메라에 담으려는 사람들이 목숨 걸고 좋은 위치를 점하려 몸싸움을 벌일 것이다. 그 순간 벚꽃 활짝 핀 반대편과 인적 드문 이편, 드라마에 열광하면서도 찾지 않는 한국인과 굳이 역사적 장소를 찾아와 머문 일본인이 머릿속에서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것이 알량한 민족주의적 발상이라면 한심한 이 '엽전'을 탓해주시길.

서애의 징비록은 시대의 반성이다. 한심한 임금은 현명한 신하를 의심하고 용맹한 장수를 목 벴다. 일부를 제외한 관료가 말렸지만 대세는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거의 자빠질 뻔한 나라가 지탱하게 된 것은 오로지 민중이 흘린 피(血) 때문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 이후 우리는 숱하게 반성했는데 그 회한(悔恨)의 숫자를 훨씬 웃도는 우매한 짓을 저지름으로써 400여년 전과 변함없는 환경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게 대한민국의 특징이라면 정녕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민족성이다.

우리는 드라마 '임진왜란'을 보고 감동하다 금세 잊었다. 영화 '명량(鳴梁)'의 흥행에 동참하다 금세 식었다. 그러곤 다시 드라마 '징비록'에서 무능한 왕과 관료들을 비판하다 망각할 것이다. '뫼비우스의 띠'를 현실 속에서 보여주려 함인가? 더 경악스러운 것은 10년 전, 20년 전만 해도 본질적인 감상(鑑賞)이 많았는데 요즘은 아예 "풍신수길 역할을 하는 ○가 연기를 잘하더라" "○는 ×같은 ◇" "소서행장이 재미있다"는 식의 역사를 망각한 평이 주류를 이루는 것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한국학연구소를 이끄는 제임스 루이스 교수는 올해 임진왜란과 관련된 책을 출간한다고 한다. 미국에서 태어나 일본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그가 임진왜란을 우리 시각과 다르게 해석하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는 한국 영화사상 최대 흥행을 기록한 '명량'에 대해서도 "제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 다른 점이 많았다"고 했다. 영국의 작은 도시 도서관에서 이 이방인(異邦人)은 우리 역사를 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안동 하회마을 옥연정사에서 서애의 자취를 더듬고 돌아와 다시 펼친 징비록에서 루이스의 변설은 류성룡이 임진왜란을 한·중·일의 국제전이요, 아시아의 판도를 바꾼 사변(事變)임을 본론도 아닌 서론에서 역설한 것을 되뇐 것임을 알게 됐다. 왜 세 번이나 읽었는데 나의 기억에 없는 그 말을 미국인은 암송하고 있었던 것인가.

서애가 쓴 책은 지금 읽어도 여전히 유효하다. "대중이 한번 무너지면 다시 수습하기가 어려운 것인데 이때는 비록 장수가 온다 해도 누구와 더불어 싸움을 하겠습니까." 이것은 아침해처럼 떠오르는 중국, 부활하는 일본과 그 북녘에 도사리고 있는 러시아를 경계하기는커녕 무슨 '리스트'와 'X파일'이 난무하는 현실에 매몰된 우리에게 서애가 던지는 마지막 경구(警句)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