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20 정상회의가 올해 중국의 항저우(杭州)에서 개최된다고 한다. 시진핑 주석은 "G20 정상회의에서는 역사와 현실이 교차하는 특색 있는 운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라며 "항저우와 쑤저우(蘇州)는 풍경이 그림 같아 인간 세계의 천당(人間天堂)으로 일컬어진다"고 소개했다.

옛날부터 '상유천당, 하유소항(上有天堂, 下有蘇杭·하늘에 천당이 있다면 땅에는 쑤저우와 항저우가 있다)'는 말이 있을 만큼, 쑤저우와 항저우는 중국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힌다. 오랫동안 많은 책과 소문으로 그 말을 듣다 보니, 그곳은 마치 꿈에 그리는 낙원 샹그릴라(shangrila)처럼 포장된 채 나의 버킷 리스트 맨 앞줄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을 당시만 해도 중국이라는 나라는 '죽의 장막'에 가려 있었고, 우리와는 국교가 없어 '갈 수 없는 나라'였기 때문에 샹그릴라와 크게 다를 것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중국이 열렸다. 그러나 막상 갈 수 있다 생각하니 그다지 마음이 동하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계속 미루다 보니 직접 쑤저우와 항저우를 구경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물론 내가 미뤄놓았던 기간에, 중국은 마치 죽순이 크듯 아주 빠른 속도로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급속한 도시화가 이루어지며 예전의 풍취가 많이 사라졌다고 한탄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가보니 그곳은 내 눈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곳이었다.

항저우는 물의 도시답게 도시 전체가 아기자기하고 수려했고, 기후가 부드럽고 온화해서 사람을 반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규모가 크면서도 아기자기하며 많은 이야기가 가득 실려 있는 서호(西湖)와, 그 서호를 단장할 때 고생하는 인부들에게 소동파가 대접했다는 동파육과 향기로운 중국의 바이주(白酒), 최고의 녹차인 룽징차(龍井茶) 그리고 남송(南宋·1127∼1279) 시대의 유적이 그곳에 있었다.

세상에 짧게 있다가 스러졌으나 예술적인 수준이 무척 높았던 남송의 역사를 보는 것은 정말 흥미로웠다. 항주는 남송의 도읍이었고 몽골의 철저한 파괴로 많이 사라졌지만, 군데군데 잔설처럼 그때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남송이라는 나라는 항저우에서 150여년간 존재했지만, 문화적으로는 무척 융성했다. 도자기는 절정기에 이르러 고려청자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많은 문인과 화가들이 활약했으며, 조선 성리학의 기반을 만들어준 주자(주희·朱熹·1130~ 1200)가 학문을 펼쳤던 시기이기도 하다. 항저우 일대를 걸어 다니며 문득문득 마치 보물찾기처럼, 오래전에 존재했던 나라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일본에는 교토의 기온이 있고, 서울에는 인사동이 있듯이, 항저우에는 청하방(淸河坊)이라는 전통 거리가 있다. 교토는 무척 오랫동안 일본의 수도였고 지금도 사람들이 알뜰살뜰 잘 가꾸고 있다. 그 안에 있는 기온 역시 현대와 전통이 조화를 이루며 모범답안처럼 잘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근대를 대충 건너뛰고 개발의 시대를 거친 서울이나, 항저우는 상황이 무척 다르다. 사실 인사동이 오래된 길이긴 하지만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의 거리가 아니었던 것처럼, 항저우의 청하방 역시 새롭게 복원된 기억의 세트 같은 곳이다.

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렀다 간다는, 전통문화가 펼쳐진 거리는 대부분 관광객을 유혹하는 먹거리나 기념품 등이 조악하게 나열되어 있게 마련이다. 당장 눈길을 끄는 데 집중하다 보니, 문화적인 향기나 깊이를 갖추기는 무척 힘이 든다. 그래서 처음 가본 도시의 깊은 주름을 보기 위해서는 통찰력이 필요하고 상상력이 필요하다.

청하방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커다란 문루가 나오고, 중산로(中山路)를 따라가다 보면 언덕으로 집들이 모여 있는 곳이 나온다. 예전 남송시대의 성벽에 사람들이 모이며 만들어진 동네라고 하는데, 마치 서울의 성북동 아래 마을처럼 길은 들쑥날쑥하고 집의 형태나 표정은 무척 다양하며 정겹다.

그렇게 화려하고 요란하게 덧씌워진 거리를 조금만 벗어나면, 도시의 속살이 보이고 역사의 한 페이지가 읽힌다. 숨어 있는 남송의 희미한 자취를 찾아 걷다 보면 문득 우리의 역사 또한 만나게 된다.

청하방에서 서호를 끼고 북쪽으로 오르다 보면 장생로(長生路)라는 길이 있는데, 그 길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두 번째 청사가 있다. 1919년 상하이에서 시작된 임시정부는 1932년 훙커우 공원에서 있었던 윤봉길 의사의 의거 후 항저우로 옮겨온다. 이곳에서 3년 6개월을 보낸 후 1940년 충칭에 자리 잡을 때까지 5곳을 전전하는 고단한 행군이 이어진다. 지금 만나게 되는 청사는 항저우시가 건물을 매입하고 2002년 중앙정부의 승인을 받아, 2007년 한국의 독립기념관과 협력하여 기념관으로 조성한 것이다.

길은 다시 '남송어가(南宋御街)'로 이어진다. 남송 황제가 지나갔다고 전해지는 옛길을 항저우 고유의 물길이 흐르는 차분한 산책로로 정비한 이 길은 청화방 거리와 대비되는 현대적인 인상을 주는데, 항저우에서 주로 활동하는 건축가 왕수(王澍)가 참여한 작업이다. 왕슈는 몇 해 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일컬어지는 프리츠커 상을 받고 세계적인 건축가의 반열에 올랐는데, 덕분에 그가 설계한 다이내믹한 건물들이 오래된 도시와 어우러지는 풍경을 볼 수 있다.

항저우는 오랜 시간 머무르며 구경해도 끝이 나지 않을 만큼 볼거리와 이야기가 풍성한 도시였다. 여행의 즐거움은 사람들이 사는 골목에서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가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네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동네 가게에서 음료수를 사서 마시고 골목을 거닐어 보는 것이 평면적인 여행을 피와 살이 도는 입체적인 기억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관광안내서를 접고 이어지는 길들을 걷다 보면 많은 시간과 기억들이 항저우의 다른 모습을 보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