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최인훈이 동서양 고전을 현대적으로 변형한 패러디 문학의 대가(大家)로 재조명됐다. 2일 동서양 학자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일본 도쿄의 국제 기독(基督) 대학에서 열린 제20회 일본 아시아 학술대회(ASCJ)에서다. 인문·사회과학을 총망라한 ASCJ의 25개 주제 발표 중 하나로 최인훈 문학 발표회가 한국문학번역원의 후원으로 열린 것.

독일의 한국학 연구자 바버라 월 교수(함부르크대)와 데니스 뷰어트너 교수(보훔대)가 구재진 교수(세명대)와 함께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했다. 월 교수는 일본어와 중국어를 익힌 뒤 한국어를 배워 최인훈의 패러디 문학 연구에 전념해왔다. 뷰어트너 교수는 조선시대 소설을 전공했고, 김시습의 '금오신화'를 영역했을 뿐 아니라 한국 현대 소설도 독일어로 번역했다.

뷰어트너 교수는 "소설가 최인훈은 다른 한국 작가들과는 달리 서구 문학을 모델로 삼지 않고 굳이 조선시대의 고전 소설에서 창작의 바탕을 찾았다"며 "전(前)근대 소설에 내재된 의미와 구조를 변형한 창작으로 1960년대 한반도 상황을 다뤘다"고 풀이했다. 최인훈의 소설 '구운몽(九雲夢)'과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분석했다. 최인훈은 고전의 주제와 모티브를 활용해 남북한 분단을 현대적 괴담과 환상으로 형상화했다. 김만중의 '구운몽'이 '현실-꿈-현실'로 이어진 꿈속의 모험담이듯이, 최인훈의 '구운몽'도 주인공의 몽환적인 이동을 다뤘다. 뷰어트너 교수는 "김만중의 소설이 종교적 사랑으로 끝난 것과는 달리 최인훈은 개인적 사랑을 선택했다"며 "하지만 두 작품은 삶의 공허함과 부조리를 그리려는 주제 의식을 공유한다"고 했다.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이승과 저승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혼령들의 기이한 이야기를 담았다. 최인훈의 '금오신화' 주인공은 자진 월북했다가 북한 체제에 절망한다. 그는 간첩으로 남파되자 귀순하려고 했지만, 엉뚱하게 살해된다. 남과 북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혼령이 중얼거리는 소설이다. 두 '금오신화'는 폭력적 현실을 비판하는 기담(奇談)이란 점에서 유사하다는 것이다.

월 교수는 최인훈의 장편 '서유기(西遊記)'를 주목했다. 그녀는 2000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가오싱젠(高行健)의 장편 '영산(靈山)'을 언급한 뒤 "명백히 드러내진 않았지만 암시적으로 '서유기'를 패러디했다"며 최인훈과 가오싱젠을 비교했다. '서유기'가 서역(西域)까지 불경을 구하러 가는 이야기이듯이, 최인훈의 '서유기'도 주인공이 '현실-꿈-현실'로 이뤄진 여행 모티브를 통해 역사적 인물과 허구적 인물을 두루 만나는 과정을 그렸다. 가오싱젠의 소설도 몽환적인 여행을 담고 있다. 월 교수는 세 작품의 공통점으로 "주인공들의 다양한 만남을 통해 진리를 다양한 관점에서 조명함으로써 '진리는 한 곳에 묶이지 않는다는 진리'를 말한다"고 설명했다.

구재진 교수는 최인훈이 독일 동화 '헨젤과 그레텔'을 패러디해 발표한 희곡 '한스와 그레텔'을 정치와 사랑의 대립으로 풀이했다. 동화에선 남매가 숲 속의 마녀를 만나지만, 최인훈 희곡에선 연인 사이인 한스와 그레텔이 히틀러를 만나는 것으로 변형됐다. 한스는 히틀러의 밀명을 받아 영국에 파견됐지만 체포됐다가 전범(戰犯)으로 수감되고, 그레텔은 30년 동안 그의 석방을 기다린다는 것. 히틀러의 실제 측근 루돌프 헤스의 삶을 패러디했다. 희곡은 한스가 정치적 신념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하며 끝난다. 구 교수는 "한스가 히틀러에게 모든 죄와 책임을 돌림으로써 죄의식으로부터 탈출했다"며 "그것은 정치로부터 벗어나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윤리적 책임으로부터의 탈출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