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언론인 앨버트 테일러(1875~1948)는 아들 브루스(1919~2015)가 태어난 1919년 2월 28일 서울의 세브란스 병원에 있었다. 당시 의료진은 3·1 운동을 앞두고 일제(日帝)의 수색을 피해 독립선언문을 외국인 병실 침대 밑에 숨겼는데, 마침 앨버트가 이를 보도해 3·1 운동이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1919년 3·1운동과 같은 해 4월 제암리 학살 사건 등을 최초로 보도한 앨버트 테일러의 손녀 제니퍼 테일러(58)씨가 지난 26일 방한했다. 2일 서울역사박물관을 찾아 앨버트 할아버지와 메리(1889~1982) 할머니 내외가 조선에서 수집한 의복·문서·편지, 할머니가 그린 당시 조선 풍경과 조선인 인물화 등 유품 349점을 기증하기 위해서다. 제니퍼는 1일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열리는 3·1절 타종(打鐘) 행사에도 참여한다.

29일 오후 서울 인사동의 한 호텔에서 만난 제니퍼는 "할아버지가 일제의 만행을 보도했고, 1942년 일제에 의해 추방되기 전까지 한국의 독립을 도운 훌륭한 분이라고 아버지에게 여러번 들었다"면서 "조부모님의 유품을 기증해 당시 한국의 모습 등을 한국인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제니퍼는 지난 2006년 아버지와 함께한 첫 방한 때 할아버지가 촬영한 1919년 고종 인산일 당시 사진, 1920년대 서울 풍경 등 사진 17점을 기증했다.

제니퍼는 이날 오전 앨버트 할아버지가 안장된 서울 합정동 서울 외국인 묘지 공원을 찾아 할아버지 묘에 아버지의 유골 일부와 묘지 흙을 뿌렸다. 앨버트 테일러는 미국에서 사망할 때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2006년에는 할머니의 묘지 흙을 가져와 할아버지 묘에 뿌렸어요. 온 가족이 한국에 모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번에도 같은 행사를 치렀습니다."

앨버트 테일러는 서울 근무 당시 행촌동 사직터널 언덕에 서양식 가옥을 짓고 '딜쿠샤'라고 이름 지었다. 테일러 부부는 1923년부터 1942년까지 이곳에 살았다. 딜쿠샤는 힌디어로 '이상향' '희망의 궁전'을 의미한다. 한국의 독립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앨버트가 직접 지었다. 서울시와 기획재정부, 문화재청 등은 지난 26일 이 가옥을 74년 만에 원형대로 복원하기로 했다. 딜쿠샤 복원 완료 시점은 3·1운동 100주년인 2019년이며, 복원 후 시민에게 공개된다. 제니퍼가 기증하기로 한 조부모 유물은 복원된 딜쿠샤에 전시될 예정이다. 제니퍼는 "한국이 딜쿠샤를 문화재로 지정해 복원한다니 소름 끼칠 정도로 즐겁다"고 했다. 그는 "다만 딜쿠샤에 수십년간 거주했다는 한국인 23명이 걱정"이라며 "서울시 등이 딜쿠샤의 뜻처럼 갈 곳 없는 그들을 위 해 또 다른 '희망의 궁전'을 마련해 이주시켜주길 바란다"고 했다.

제니퍼는 지난해부터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 할머니가 미국에서 집필한 '호박 목걸이'를 영화로 옮기는 것이다. "책에 할아버지가 한국의 독립을 어떻게 도왔는지, 고종 인산일을 어떻게 취재했는지 등이 생생히 적혀 있어요. 할아버지의 활약상과 한국의 독립운동사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