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은주·임형남의 골목 발견] 종로 '옥인동'

옥인동은 옥동과 인왕곡이 합쳐진 지명이다. 조선 말기에 만들어진 서울 지도인 '수선전도'를 보면 인왕산으로부터 한 줄기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계곡 옆으로 옥류동이라고 써 놓은 것이 보인다.

지금은 물길이 전혀 보이지 않지만 원래 그곳은 옥같이 서늘하고 맑은 색을 지닌 물이 흐르던 동네였을 것이다. 마음의 눈을 열고 상상 속으로 들어가 옥인동을 걸어보자. 옥인동은 서울의 우백호인 인자하지만 근엄한 모습을 하고 있는 인왕산의 가슴에 포근히 안겨 있는 마을이다. 그 안에는 무척 많은 시간이 잠겨 있다.

그 속에는 조선이 새로 만들어져 나라의 기틀이 다져지던 시간이 있고, 겸재 정선이 인왕곡에서 청풍계를 오가며 그림을 그리던 시간도 있고, 송석도인이라 불렸던 천수경을 비롯한 한 무리의 문인들이 모여서 여항문학(閭巷文學·조선 후기 서울에서 중인층이 중심이 되어 주도했던 한문학을 뜻하며, 위항문학(委巷文學)이라고도 함)을 일구었던 시간도 있다. 또한 조선이 망하고 일제가 강점하던 시절 친일파들이 득세하며 호령하던 시간도 있다.

그래서 나는 그곳을 '보이지 않는 시간의 순례'라고 제목을 붙여 사람들과 답사했었다. 마치 병 바닥에 고여 있다가 자극을 가하면 떠오르는 침전물처럼 많은 시간과 기억의 조각들이 우리가 찾아가면 바닥에서부터 희뿌옇게 회오리치며 일어나는 곳이다.

내가 옥인동이라는 마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서울 중구 필동에 수도방위사령부가 떠나고 그 자리에 '남산골 한옥마을'이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종로구 삼청동의 김춘영 가옥과 관훈동의 박영효 가옥, 도편수 이승업 가옥 등 서울 곳곳에 흩어져 있던 한옥 몇 채를 이전 복원한 그곳을 90년대 초에 개장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찾아갔었다.

'남산골 한옥마을'에 들어서면 제일 처음 만나게 되는 집이 바로 '순정효황후 윤비친가'라고 가운데 마당이 있는 네모 반듯한 집이다. 골격이 늠름하고 집안의 공간이 호방하면서도 구석구석은 아기자기한 집인데, 단순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들어가는 입구에 붙여놓은 설명을 읽어보니 그 집은 옥인동에 있는 조선의 마지막 왕비였던 순종의 계비 윤씨가 황후로 들어오기 전에 살았던 집이라고 한다. 다만 그 집이 너무 낡아서 옮기지 못해 이곳에 그대로 복원했노라 적혀 있었다. 옥인동에 있다는 원래의 집이 보고 싶어져서 물어물어 옥인동 골목을 더듬어 그 집을 찾게 되었다.

지금이야 서촌이라는 동네는 사람들이 사진기 들고 찾아가고, 커피 마시러 찾아가고, 답사하러 일부러 찾아가는 곳이 되었지만 90년대 초에 옥인동을 비롯한 경복궁 서쪽 동네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이었다. 청와대 인근에 있어 경비가 삼엄하고 제약이 많아 땅값이 오르지 않는 서울 속의 벽촌 같은 곳이었다.

인왕산을 바라보며 옥인동 군인아파트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가서 또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자 낡고 여기저기 기울었지만 화려한 화강석 계단석과 소맷돌과 더불어 집이 한 채 몰락한 양반댁 마님과 같이 꼿꼿하고 단호한 자태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나뭇가지가 마치 아치를 틀어놓은 입구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그 가지로 만든 아치를 지나자 집의 전모가 보였다. 집은 우아함과 화려함을 시간의 옷으로 가린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내 감동에 사로잡혔다. 화려한 문살과 정교하게 쌓은 석축 그리고 우아한 소맷돌이 때가 묻고 기울었지만 아름다운 비례와 손맛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구한말의 어느 솜씨 좋은 목수와 솜씨 좋은 석수가 서로 경쟁을 하며 정성을 들여 만든 집일 것이었다.

그 안에 사람들이 살고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대문 틈으로 슬쩍 들여다보았다. 짐으로 가득한 마당과 여기저기 손을 많이 본 퇴락한 집의 모습이 원래의 호방한 형태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변형되어 있었다. 그 집은 마치 많은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는 옥인동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옥인동이라는 동네를 처음으로 가보게 되었다. 그리고 어두운 극장에서 조금씩 눈이 열리며 형체들이 눈에 들어오듯 그 동네에 잠겨 있는 시간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옥인동 군인아파트 부근은 겸재 정선이 장년이 되어 이사해서 생을 마칠 때까지 살았던 집터가 있던 곳이었고 그때의 모습을 그림으로 많이 남아 있다. 십여년의 시간 간격을 두고 그린 '인곡유거(仁谷幽居)'와 '인곡정사(仁谷精舍)'라는 그림을 보면 정선이 어떤 집을 짓고 살았고 그 동네가 그때는 어떤 모습이었으며, 십여년 동안 정선의 살림살이가 어느 정도 일어났는지가 아주 생생하게 보인다.

그리고 겸재는 옥동고개를 넘어 청풍계로 마실을 가기도 하고(옥동척강·玉洞陟崗) 마루에 앉아 부채질하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독서여가·讀書餘暇). 겸재가 보고 그렸던 지점으로 그림을 들고 가서 현재의 모습을 보노라면 마치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증강 현실(현실 세계에 가상 물체를 겹쳐 보여주는 기술)'을 200년의 시간차로 느낄 수 있다.

한편 일제강점기로 넘어오면 친일 행위로 크게 부귀영화를 누렸던 윤덕영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바로 인접한 통인동은 이완용이 거의 다 차지했고, 옥인동은 윤덕영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 프랑스에서 설계 도면을 얻어다 중국인 인부와 독일인 감독을 고용하여 '벽수산장'이라는 장원을 만들었다.

순정효황후 윤비는 윤덕영의 동생인 윤택영의 딸이다. 윤택영은 첫째 부인과 사별한 순종의 계비로 자신의 딸이 간택되게 하고자 백방으로 로비를 했고, 그 때문에 많은 부채가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 신문을 보면 '부채왕' 윤택영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아버지와 달리 윤비는 마지막 순간까지 옥새를 지키는 등 꼿꼿하고 의연하게 살았다고 한다.

옥인동 골목은 예전에 오랫동안 계곡이 있었고 소나무 숲이 있었던 곳이 근대를 거치며 메워지고 채워진 곳이다. 그래서 그곳에서 예전의 자연을 느끼기란 쉽지 않지만, 땅의 흐름과 골목의 흐름 속에 예전의 자취가 점점이 박혀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곤 한다. 휘젓지 않으면 절대로 모습을 보여주지 않지만, 이야기를 듣고 들어가면 마치 오래된 문이 열리듯이 시간의 문이 열리며 우리에게 장관을 보여주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