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백석(1912~1996) 시인 연구로 석사 논문을 쓴 뒤 늘 백석 시어(詩語) 사전을 만들려고 했다. 누구의 시를 읽더라도 백석의 시어와 비교하면서 음미했고, 무슨 책을 읽더라도 백석의 어휘와 연관된 설명을 찾으려고 했다. 지금껏 내 독서는 결국 백석의 시에 주석(註釋)을 다는 것이었던 셈이다."

백석 연구의 권위자로 꼽히는 고형진(56)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가 시어 사전 '백석 시의 물명고(物名攷)'를 고려대 출판부에서 냈다. '물명고'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여러 물명(物名)을 풀이한 어휘 사전을 가리킨 말이다. 2000년대 이후 백석 전집과 평전이 여럿 나왔지만 백석 시어 사전은 이번에 처음 등장했다.

고형진 교수는 "백석이 1935~1948년에 발표한 시 98편에 등장한 3366개 시어를 조사했다"며 "나 자신도 한때 오독했던 어휘의 뜻을 새로 알게 되곤 했다"고 밝혔다. 1부는 시어를 체언과 용언으로 나눈 뒤 사람·생활·사물·감각·동식물 등 10가지 의미에 따라 분류해 풀이와 용례를 실었다. 2부는 시어를 자모순(子母順)으로 배열한 뜻풀이 사전이다. 백석 시어의 특징에 관한 해설도 곁들였기에 1076쪽에 이르는 대형 사전이 됐다.

백석은 평안도 방언에 기반을 둔 토속어를 숱하게 구사했다. 그래서 몇몇 어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해석이 엇갈렸다. 고 교수는 지난 10년 동안 백석 시어 사전 작업에 몰두했다. 국어학과 민속학, 한문학 교수들의 도움도 받았다. 그는 "백석은 항상 사람의 생활을 구체어로 이야기했기에 의식주에 관한 어휘가 많았다"며 "백석의 시는 그야말로 옛날 한국인의 생활을 보여주는 박물지(博物誌)이자 모국어의 원석(原石)"이라고 말했다.

백석은 국민 애송시가 된 '국수'의 시인답게 203개의 음식 어휘를 사용했다. 떡 이름이 가장 많이 등장했다. '인절미'라고 썼다가 평북 방언 '니차떡'을 쓰기도 했다. 생소한 식생활 용어도 많았다. '호박닢에 싸오는 붕어곰은 언제나 맛있었다'(시 '주막')에서 '붕어곰'은 흔히 '붕어찜'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고 교수는 '붕어를 진하게 곤 것'이라고 새로 풀이했다. 북한에선 '잉어곰'이란 말도 쓴다는 것.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시 '국수')에서 '김치가재미'는 음식으로 해석하기 쉬웠다. 그러나 고 교수는 "김치를 묻은 뒤 그 위에 지푸라기나 수수깡 따위로 만든 움막을 가리키는 평북 방언"이라고 풀이했다.

백석은 옷에 관한 어휘력도 풍부했다. 그중 '물팩치기'는 오랫동안 연구자들에게도 수수께끼였다. 고 교수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짧은 바지나 치마'라고 풀이했다. 무릎을 뜻하는 사투리 '물패기'와 '두루치기(폭이 좁고 짧은 치마)'처럼 옷을 가리키는 '치기'의 합성어라는 것이다.

고 교수는 "백석은 색채와 명암 언어에도 뛰어났다"며 "그는 흰색의 시인이었다"고 풀이했다. 흰 당나귀, 박꽃, 무명옷, 회담벽, 초승달 같은 시어를 즐겨 썼다. "흰 당나귀는 온순하고, 박꽃은 컴컴한 밤에 흰빛을 선사하고, 무명옷과 회담벽은 은은하다. 백석이 사랑한 것은 모두 소박하고 검소하고 겸손해서 질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고 교수의 시어 사전은 옛날 농기구와 생활용품 상당수를 삽화로 처리해 일반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이 사전은 기행시를 많이 쓴 백석이 거쳐간 지명(地名)을 식민지 시대 당시 행정 구역에 맞게 재현한 지도(地圖)로 표현하기도 했다. 고 교수는 "이 사전을 통해 백석 시에서 난해어의 뜻을 새로 정립한 것이 적지 않다"며 "이 사전이 시를 창작하는 사람과 일반 독자 모두에게 백석 시의 재료와 작업 도구가 든 '연장통'으로 받아들여지길 바란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