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폐허의 군산을 떠나 폐허의 명동으로 왔다."

고은(高銀·82) 시인은 1950년대 전쟁 직후의 풍경을 이렇게 회고했다. 고향 군산의 항구는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작전 지역을 숨기기 위한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파괴됐다. 전후(戰後)의 명동도 명동성당을 제외하고는 잿더미와 다름없었다. 그는 "살아남은 자들은 지붕도 없는 명동의 노천 주막에서 드럼통을 탁자 삼아 술을 들이켰고 비가 쏟아지면 술꾼도, 주모(酒母)도, 술 항아리도 비를 맞았다"면서 "이 땅에서 허무와 실존은 밀실이나 관념이 아니라 현실과 체험의 문제였다"고 했다. 시인은 "지금도 여의도 63빌딩이나 강남 거리를 지나갈 때면 대형 건물이 폐허로 바뀌는 듯한 환영(幻影)에 시달린다"며 "폐허는 내게 불치병"이라고 했다.

그 잿더미에서 1950년대 전후 문학이 태어났다. 1958년 시(詩) '폐결핵'을 발표하며 등단한 고은 시인은 "과거도, 미래도 없이 고아처럼 살아남았기에 잡초처럼 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전후 문학 세대의 특징"이라며 "전후 문학인들은 서정주와 '청록파(靑鹿派)'로 대표되는 이전 세대의 농촌 정서를 전면 부정하면서 출발했다"고 회고했다. 이들은 동대문시장으로 흘러나온 구호물자에서 '존'이나 '피츠제럴드'라고 박음질이 된 헌 옷을 입고, 변변한 책상도 없이 사과 궤짝에 종이 한 장을 올려놓고 글을 썼다. 시인 고은의 눈에 비친 '목마와 숙녀'의 박인환은 "폐허에서 최초로 나타난 시인이자 선구자"였다. 시인 김수영에 대해서는 "위선보다는 위악에 강하고 거짓이 일절 없었던 사람이었다"고 했다. 김수영은 고은의 문학적 가능성을 처음으로 인정하고 격려했던 문단 선배이기도 했다.

그는 전쟁 통의 문단에서 따스한 인간미를 보였던 문인으로 소설가 선우휘와 시인 구상을 꼽았다. 1·4 후퇴 당시 육군 정훈국 평양분실장이었던 선우휘는 부하들과 함께 파괴된 대동강 철교를 긴급 수리했다. 고은은 "그가 아니었다면 평양의 피란민 행렬은 막히고 말았을 것"이라고 했다. 또 고은 시인은 "종군기자단에 합류했던 구상은 동료 문인들을 한 명이라도 더 먹여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면서 "이들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남아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고은은 1986년부터 2010년까지 30권 4001편으로 출간한 연작시 '만인보(萬人譜)' 등으로 현재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된다. 시인은 "우리 현대사는 700년을 압축한 듯한 70년이었다"면서 "밥에도 이따금 모래나 구정물이 섞일 수 있듯이 현대사에도 영욕(榮辱)이 모두 들어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 세대가 거대한 시대의 격랑에 휩쓸렸다면 지금 아이들에게는 자아의 골짜기에 세세하게 파묻힌 듯한 미시(微視)의 삶이 있다"면서 "교훈을 주거나 호통치는 교사 노릇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아이들이 울거나 할 때 곁에서 술 한잔 따라주는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