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가면 연락할게."

그녀의 전화를 받고, '이제 우리도 반환점을 돌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전 직장의 오랜 동료였다. 어떤 부서에 가든, 어떤 자리에 있든 '공부는 나의 힘'을 외치며, 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20년 근속 기간 최고의 인재로 인정받던 그녀가 해고된 지도 1년이 지났다. 본사가 유례없는 실적 악화에 따라 단행한 조직 개편에서 부서가 통째로 날아간 결과였다.

그랬던 그녀가 새로운 채용 면접을 앞두고 내게 조언을 구한다며 연락을 해 온 것이다. 내가 아는 한 가장 탄탄한 경력과 성실함을 갖춘 마케팅 통인 그녀가 적절한 자리를 찾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부침이 심하고, 조로현상이 심한 업계에서 이제 마흔 후반인 그녀를 들이기 꺼린다는 것이다.

늘 최고 회사에서 인재로 대접받던 그녀를 어쩔 수 없는 세월의 무게가 따라잡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경력에 대해 실패나 중단, 자발적 휴식을 받아들일 수 없는 열혈 직장인, 소위 '멈추지 못하는 여자'의 전형이다. 남성으로 주어를 바꿔도 큰 차이는 없다. 어려서부터 자식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좋은 부모님 밑에서 자라 기대만큼 공부를 잘했고, 학교를 졸업하고는 바로 일을 시작하여 지독한 성실함과 열정으로 경력을 쌓아 어디서나 당당한 사회인으로 살아온 그와 그녀들.

그런 그들을 세월이 따라잡을 때, 중년의 저주가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할 때,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취약한 자신을 발견하고 경악한다. 어떻게든 오르는 것, 더 열심히 채찍질하는 것밖에 모르는 이 성실한 일중독자들이 대책 없는 마흔의 사춘기를 맞게 되면 그 혼란은 상상 이상이다. 내면의 폭풍을 다스리는 것만으로도 힘이 드는데, 외부의 상황은 더욱 예측불허로 변해간다. 평생을 바친 회사가 나를 퇴물 취급하고 내 마음이 나를 배신하는 허무와 혼란의 시기에 대처하기에 그들은 너무 성실하고 (이기는 것만을 유일한 생존법으로 안다는 측면에서) 무지하다.

자의든 타의든 회사를 벗어나 주부와 프리랜서의 옷을 느슨하게 걸쳐 입은 지 3년째다. 마흔의 답을 찾아 헤매는 친구들이 연락할 때마다 나는 그냥 놀러 오라고 한다. 나 역시 답 없는 인생인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진짜 부산행을 감행해준 친구를 데리고 해운대보다 조용한 송정 해변에 가서 바닷바람을 쐬고, 시장통에 숨어 있는 소박한 밥집을 찾아간다. 서울에서 먹어본 적 없을 돼지국밥을 함께 먹고, 통과의례처럼 밀면을 먹는다.

낡은 연립주택과 상가 건물이 가파르게 들어찬 언덕길을 한참 오르다 보면 등장하는 오래된 작은 시장 골목에 그 집이 있다. 내호냉면. 고풍스런 정자체 간판이 오랜 연륜을 짐작하게 하는 이곳은 밀면을 처음 만든 집으로 유명하다.

무색투명에 가까운 평양냉면보다는 조금 색이 진한 국물, 누르스름한 면발 사리로 지은 섬 위에 절인 무채와 배, 편육, 선연한 다홍빛의 양념장이 올려져 있다. '비냉'(비빔냉면)과 '물냉'의 절충형 같은 모양새다. 물냉은 평양냉면, 비냉은 함흥냉면이라는, 냉면에 대해 원리주의자를 자처하는 친구는 이도 저도 아닌 밀면의 비주얼이 영 맘에 안 드는 눈치다. 국물의 기본은 심심한 고기 육수지만 여기에 양념장이 섞이면 국물 자체가 걸쭉해지며 단맛이 난다. 면은 전분이 중심이 되는 질긴 함흥냉면과 달리, 밀가루가 주성분인지라 먹기가 수월하다. 시원 달큼하고 매콤한 맛이 가미된 국물, 단출한 꾸미(국이나 찌개에 넣는 고기붙이)와 면발이 잘 어우러지는 국수라 때 이른 더위로 땀 흘린 뒤에 먹는 맛이 각별하다. 그래도 입맛 까다로운 친구가 이 낯선 음식을 잘 먹으려나 싶었는데, 고개를 끄덕이며 한 그릇을 비웠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그렇지? 이건 이 나름대로 맛이 있다고."

부산의 명물로 알려진 밀면의 시작은 결핍과 전환이다. 변화 또는 진화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밀면은 생긴 모양대로 냉면에서 온 것이다. 내호냉면을 운영하는 가족도 원래 함경도 내호 지역에서 냉면집을 하던 집안이라 했다. 전란 후 정착한 부산에서는 함흥냉면의 질깃한 면발을 뽑아낼 질 좋은 감자 전분을 구하기 힘들었다. 이곳 사람들도 국수를 좋아했지만, 메밀과 농마(전분)를 중심으로 하는 이북의 면 문화와 달리 밀국수를 먹었다.

결국 구하기 쉬운 밀과 고구마 전분을 섞어 밀면이 탄생했다. 재료를 구하기 어렵고 부산 사람들에게 낯선 함흥식 냉면을 고집하다 사라지느니 지역에 맞는 변화를 택한 것이다. 값싸고 먹기도 수월한 밀면은 부산 사람들의 입맛도 사로잡았다. 3대가 이어온 내호냉면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리고 지금 부산의 대표적 여름 면식은 냉면이 아니라 밀면이다.

상실과 전환의 시기, 중년의 초입에 만난 밀면 덕분에 인생의 후반부에 짚고 가야 할 키워드를 곱씹어본다. 큰길이 막히면, 그 길에 가려 보이지도 않던 다른 경로가 드러나기도 하는 법이다. 워커홀릭 커리어 우먼의 길에서 벗어나 내가 발견한 길은 글쓰기였다. 냉면의 재료를 구하기 힘들어 고안된 밀면이 지역의 명물이 된 것처럼, 누가 또 아는가. 말년운 좋다던 점쟁이 말대로 회사에서 성공하는 대신 직장을 소재로 한 호러코미디소설을 써서 대박이 날지. 인생 후반전은 이제 막 시작인데. 안 그래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