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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4.14 10:42 | 수정 : 2015.04.14 10:44

숱 많은 검은 머리, 팔자 모양의 두툼한 콧수염, 미끄러질 듯 콧등에 걸린 안경과 입에 문 파이프.

‘양철북’의 저자로 국내에도 유명한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자 전후 독일의 대표 지성인으로 꼽히는 귄터 그라스(사진)가 지난 13일(현지시각) 독일 뤼벡의 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87세. <조선비즈 2015년 4월13일 '양철북'의 노벨상 수상 작가 귄터 그라스 사망 기사 참고>

그는 1927년 독일 단치히 자유시(지금 폴란드 그단스크) 태생이다. 2차 대전 기간에 청소년기를 보낸 그가 문단에 발을 들인 건 1954년의 일이다. 서정시 대회 입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한 그는 같은 해 전후 독일어권 문학의 대표 집단으로 꼽히는 ‘47그룹’에 가입했다.

한동안 47그룹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그라스의 운명을 바꾼 건 1958년 가을. ‘만성절(All Saint’s Day)’ 휴일 주간에 열린 강독회였다. 독일 시사주간 슈피겔은 당시의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숱 많은 팔자 콧수염을 기른 한 작가가 일어나 두터운 종이뭉치를 손에 쥐고서 소설의 두 장(章)을 읽어 내려갔다. 좌중을 충격에 빠뜨리는 건 단 몇 문장 만으로 충분했다 . 그가 당시 서른 한 살이던 귄터 그라스였고, 그 손에 쥔 종이뭉치는 ‘양철북’의 초고였다.”

스스로 성장을 거부한 난쟁이 오스카의 회고담을 통해 나치즘의 폐해를 우화적으로 표현한 ‘양철북’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해 47그룹은 그라스에게 ‘47그룹 문학상’을 수여했고, 1959년 정식으로 출간된 뒤에는 ‘뷔히너 상’ '폰타네 상’ ‘테오도르 호이스 상’ 등 수많은 문학상을 휩쓸었다.

출간 직후 동독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금서’로 지정됐지만 서독, 유럽, 미국 등 세계 각국 언어로 번역돼 널리 읽혔다.

그라스가 창조해낸 ‘양철북’의 주인공 오스카 마체라트는 현재까지도 ‘파우스트’ ‘억척어멈’과 함께 독일 문학에서 가장 사랑받는 주인공으로 꼽힌다. ‘양철북’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1979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기도 했다.

그라스는 그 뒤로도 '개들의 시절'(1963) '국부마취'(1969) '넙치'(1977) '텔그테에서의 만남'(1979) 등의 대작을 발표하며 유럽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 잡았다.

1999년에는 자신의 생을 갈무리한 장편 소설 ‘나의 세기’를 발표했고, 그 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라스는 소설부터 시인, 그래픽 아티스트를 오가는 예술가로도 왕성한 창작활동을 벌였다.

그는 독일을 대표하는 행동파 지식인이기도 했다. 끊임없이 2차 대전과 관련해 독일의 자성(自省)을 촉구했고, 첨예한 정치사회적인 사안에도 논쟁을 주도하던 작가였다. 국제정치 현실에 대한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2006년 자전적 소설 ‘양파껍질을 벗기며’ 출간을 앞두고 2차 대전 막바지 극단적이며 폭력적인 활동으로 악명 높았던 ‘나치 친위대(Waffen-SS)’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해 파문을 자초했다.

그는 당시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와의 인터뷰에서 “오늘날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마음의 커다란 짐이었다”면서 “그 때문에 이 책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나치 친위대는 위험한 전투에 항상 투입되는 엘리트 부대였으며, 당시에는 젊은 날의 치기로 가입했지만 전쟁이 끝난 뒤 수치스러운 감정으로 괴로웠다”고 했다.

그 뒤로도 그의 양심 발언은 끊이지 않았다. 2012년에는 이란의 핵 개발 프로그램을 저지하려는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내용의 시 ‘말해야만 하는 것(What Must Be Said)’를 발표해 이스라엘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훗날 그라스는 “핵 개발 저지를 주장하며 세계 평화를 깨뜨리려는 이스라엘 정부에 대한 공격이었지, 그 국가 자체를 비난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한국과도 인연이 있었다. 축구광인 그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밤의 경기장’이라는 제목의 축시를 보냈다.

'밤의 경기장'

천천히 축구공이 하늘로 떠올랐다.
그때 사람들은 꽉 찬 관중석을 보았다.
고독하게 시인은 골대 앞에 서 있었고,
그러나 심판은 호각을 불었다.
오프사이드.

'Naechtliches Stadion'

Langsam ging der Fussball am Himmel auf.
Nun sah man, dass die Tribuene besetzt war.
Einsam stand der Dichter im Tor,
doch der Schiedsrichter pfiff
Abseits.

숨진 그라스의 사망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13일 그라스의 타계를 발표한 출판사 관계자가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8일 전 그라스가 집필한 신작에 대해 논의한 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라며 “그라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작품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그라스는 산문시로 쓴 이 작품에 대해 ‘문학적 실험’이라고 묘사했다. 올해 여름 출간될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