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부터 인천은 서울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그렇다고 인천을 서울의 위성도시쯤으로 여기는 건 오만한 일이다. 인천의 근대사가 곧 대한민국의 근대사이고, 이 도시를 바로 보는 것이 우리 역사를 마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본과 서구 열강이 반강제적으로 제물포항을 열긴 했지만, 그들을 따라 여러 문물과 근대 문화가 우리 땅에 정착한 것도 사실이다. 이야기보따리 한 가득 품은 인천을 제대로 알고 싶으면 인천둘레길을 권한다. 굵직한 역사는 물론이고, 어지러웠던 시절 서민의 애환도 길에 스며 있다. 길은 모두 14코스 120㎞에 이른다. 가장 긴 코스가 12.7㎞로, 대부분 평탄하다. 민관이 뭉쳐 계양산부터 청량산에 이르는 인천 지역의 녹지를 보존할 생각으로 둘레길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2011년 12월 1~9코스를 개장했고 지난해 7월 10~14코스를 추가로 연결해 모두 120㎞에 달하는 인천둘레길이 완성됐다. week&은 이 중에서 11코스 연탄길(5.2㎞)과 12코스 성창포길(5㎞)을 걸었다. 근대도시 인천의 모습이 길목마다 배어 있는 길이었다.


고단한 달동네의 변신 - 11코스 연탄길

지난달 23일 김종운(57) 해설사와 함께 인천둘레길을 걸었다. 11코스는 지하철 1호선 도원역 1번 출구에서 시작됐다. 1899년 우리나라에 처음 기차가 등장한 곳이 인천이다. 인천역에서 출발해 노량진역까지 가는 철로(약 33㎞)가 놓였는데, 도원역에서 기공식이 열렸다. 당시 도원역은 인천 교통의 요지였다. 서울로 가는 철로와 신작로가 모두 이곳을 중심으로 뻗어나갔다.

철도가 생기기 전 인천에서 서울 사대문 안까지는 걸어서 12시간이 걸렸다. 철로가 놓인 뒤로는 1시간30분으로 단축됐다.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정시(定時) 관념이 생긴 것도 이때부터다. 제시간에 맞춰 출발하는 기차를 놓치지 않으려면 시간을 정확히 지켜야 했다.

도원역에서 출발한 길은 대로변을 지나 쇠뿔고개로 들었다. 쇠뿔고개는 우각로문화마을이 있는 남구 숭의동 일대의 옛 이름이다. 이 동네는 원래 재개발 지역이었다. 아파트 단지를 지으려고 했다가 중간에 계획을 틀었다. 마을에 남은 주민 일부와 외부에서 들어온 예술인이 공동체를 형성해 벽화도 그리고 게스트하우스·공방 등을 운영하면서 예술인 마을로 가꾸고 있다.

쇠뿔고개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884년 제물포 개항 직후였다. 제물포를 외국인에게 빼앗긴 조선인이 여기에 터를 잡았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피란민이, 1970년대에는 일자리를 찾아 흘러든 노동자가 쇠뿔고개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갔다. 이 오래된 달동네는 인천둘레길이 생기기 전부터 유명했다. 중·장년층은 동네 구석구석을 살피며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젊은이는 생경한 골목 풍경을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았다.

각양각색의 건물에 따라 하늘이 손톱만큼 쪼그라들었다가 어느 순간 둑 터진 듯이 광활해졌다. 고요함을 깨고 유쾌한 대화소리가 들렸다. 한 할아버지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부성이발관’ 문을 나섰다. 새로 깎은 머리가 마음에 쏙 들었나 보다. 50년 넘게 골목을 지킨 이발관다운 푸근한 모습이었다.

우각로문화마을 가장 꼭대기에 있는 구 전도관 건물을 마지막으로 마을 탐방이 끝났다. 개교 100년이 넘는 영화초등학교와 창영초등학교를 지나 도착한 곳은 배다리역사문화마을이었다. 여기에는 유명한 헌책방 골목이 있다. 70년대까지는 50곳이 넘는 헌책방이 있었지만 지금은 5곳만 남았다. 서울에서도 책을 사러 왔을 정도로 번창했다는데 지금은 관광객이 주요 고객이다. 빛바랜 시집을 들추며 옛 추억에 잠긴 노신사 뒤에서 평소 흠모하는 작가의 초기작을 찾아낸 30대 여성이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탄성을 질렀다.

길은 송현동에 있는 수도국산으로 향했다. 이 나지막한 동산의 원래 이름은 송림산이었다. 1909년 산 정상에 수도국이 생기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여기에도 달동네가 있었는데 지금은 아파트만 빼곡하다. 공식 기록에는 수도국산 일대에 3000가구가 있었다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3만 가구가 살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지인이 어릴 때 여기 살았는데, 집을 개조해 방을 20칸으로 늘려 세를 줬대요.” 김종운 해설사가 나직하게 말했다. 10분쯤 내리막을 따라 걷자 11코스 종착점인 동인천역에 도착했다.


100년 전으로의 시간여행 - 12코스 성창포길

12코스의 이름은 성창포길로 인천항의 옛 이름 성창포에서 따왔다. “12코스가 지나는 중구는 공동화 현상이 심한 지역입니다. 제물포 개항 이후 100년 넘게 중심지 역할을 하다가 80년대 시청과 관공서가 남구로 이동하면서 급격히 낙후됐습니다.” 동인천역에서 잠깐 숨을 고르며 김종운 해설사가 말했다.

인천 중구와 동구 일대는 원도심 혹은 구도심이라 불린다. 유럽의 고도(古都)를 형성 시기에 따라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구분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렇다고 인천의 원도심이 유럽의 오랜 도시처럼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건 아니다. 대신 띄엄띄엄 남아있는 근대 유적이 현대의 것과 뒤섞여 오묘한 매력을 풍겼다.

동인천역과 바로 붙어있는 중앙시장을 통과해 시장 문패가 서있는 배다리사거리를 지났다. 개항 직후 인천항 주변으로 영사관이 줄지어 있었지만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거의 사라졌다. 그나마 가장 온전하게 남은 것이 답동성당이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펼치면서 답동성당에만 폭격을 하지 말라고 명령했대요.” 김종운 해설사가 귀띔해줬다.

개항 전 인천 인구는 3000명이었는데 30년대에는 4만 명 가까이 됐다. 현재는 약 280만 명이다. 하지만 이 중에서 인천을 자신의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10~20%라고 한다. 70년대 일자리를 찾아 들어온 전라도·충청도 출신이 가장 많고, 황해도가 고향인 사람도 꽤 있다. 통일이 되면 얼른 고향에 돌아갈 심산으로 인천에 자리를 잡은 것이 벌써 60년이 지났다.

닭강정과 중국식 호떡 ‘공갈빵’으로 유명한 신포시장을 지나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으로 향했다. 인천에는 ‘최초’ 타이틀을 보유한 명물이 41가지나 된다. 자유공원도 이 중 하나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공원이다. 불을 환하게 밝힌 인천 내항과 월미도 뒤로 길쭉하게 뻗은 인천대교가 아스라이 보였다. 맑은 날에는 인천대교의 두 주탑 사이로 연안부두까지 조망되는데 이날은 미세먼지 때문에 시야가 흐렸다.

자유공원에서 내려오자 휘황찬란한 차이나타운이 시작됐다. 차이나타운은 옛날 청나라 조계지(租界地)였다. 조계지란 외국인이 자유롭게 거주하도록 치외법권(治外法權)을 부여한 지역을 말한다. 황금색과 붉은색으로 치장한 건물마다 중국요리와 중국산 제품을 파는 상점으로 가득했다. 차이나타운 바로 옆 동네가 일본인이 거주했던 지역이다. 일본제일은행·일본18은행·제물포구락부 등 고풍스러운 건물을 차례로 지났다. 이들 건물은 현재 박물관·전시관 등 문화공간으로 쓰인다.

성창포길은 『삼국지』에 나오는 주요 사건을 벽화로 꾸민 벽화거리, 차이나타운의 대문 패루(牌樓)를 통과해 인천역에서 끝났다. 한나절 동안 시간여행을 갔다 온 느낌이었다. 서울로 가는 전철에 올랐다. 100년 전에도 이 길에는 기차가 달렸다. 그때 그 시절 기차에서 바라본 풍경을 머릿속에 그리다 보니 어느새 서울에 닿아 있었다.



글=홍지연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