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수천 장의 면지를 앞에 두고 묵묵히 사인을 하고 있었다. 초판 사인본의 경우, 마케터들이 여러 작가의 작업실 등지에 제본소에서 갓 나온 수백 권의 책을 들고 가 찾아뵙고 사인을 받은 후 다시 가져오곤 한다. 그러나 수천 권의 책을 쌓아두고 사인을 하기에는 공간적 제약이 있을 뿐만 아니라 책을 옮기며 사인을 하는 게 막심한 피로가 따르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거장 황석영의 신작 <낯익은 세상>의 경우, 수천 장의 면지에 사인을 받고 인쇄 후 제본 작업 시 면지를 함께 제본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수천 권의 책은 방 한칸을 차지하는 분량이지만, 면지 수천 장은 큰 박스 두어 개를 차지한다. 책 수천 권을 일일이 나르는 것보다 면지를 옮기는 게 수월키도 하다. 물론, 수천 장에 수천 번의 사인을 하는 행위 자체가 고된 일인 건 변함이 없다.

황석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