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

 

책 표지 안쪽에 실린 작가의 눈초리가 날카롭다.

왕국.

제목과 함께 베일을 뒤집어쓴 여성의 사진이 무척이나 호기심을 자극한다.

얼른 저 베일을 벗기고 알맹이를 보고 싶어...

천재 소매치기 청년을 그린 전작 <쓰리>에서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쓴 것이 바로 이 책　<왕국>이란다.

<쓰리>란 제목이 ‘3'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청소년 풍의 그림이 표지로 선정되어 쉽사리 손이 가지 않았던 탓에 아직 읽어보지는 못하고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었다.

인류 최초의 직업이 매춘, 그 다음이 소매치기.

“음...정말?”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놀랄 노자인 이야기.

그리고 그 중에서 매춘을 소재로 해서 소설로 풀어냈다는 이 <왕국>도 놀랄 만한 이야기.

인간은 태양보다 달에, 낮보다 밤에, 일상보다 조용한 광기에 이끌린다.-46

아름다운 외모를 무기로 남자의 약점을 움켜쥐는 일을 맡게 된 유리카. 자유롭게 활동하고 언제든 빠져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며 무심히 일을 해나간다. 그러나 그녀는 실상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천만한 일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 유리카가 어린 시절 신세진 아동시설의 원장이기도 하면서 검은 세계에서 엄청난 파워를 가지고 있는 인물, 기자키를 만나게 되면서 유리카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된다. 친구의 아이를 살리려고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아이는 죽게 되었고 습관적으로 일만 받아 처리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약점이 없는 사람이 되어 위험한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녀를 아동시설에서부터 눈여겨 보아왔다는 기자키는 그녀의 모든 것을 간파하고 손바닥 위에 그녀를 올려놓고 이리저리 굴리는 인간이다.

약점이 없다----

야다의 그 말이 마음에 남는다. 그건 강하다는 뜻이 아니다. 인생과의 거리를 나타내는 고독과 절망에 가깝다.-70

“이래서는 나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요.나는....”

“뭐가 뭔지 모르는 채 죽어가는 사람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해. 내가.”

나는 기자키를 멍하니 바라본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왜 이런 일에 휘말렸는가. 나는 왜 죽는가. 그런 부조리한 소용돌이 속에서 죽어가는 이간을 지켜보는 것이 정말 즐거워.”-118

달과 인간의 광기.

몸에 얇은 천 한 장만 두른 여자들이 광장에서 술에 흠뻑 취한다.

플로랄리아. 고대 로마에서 거행된 창부들의 축제. 엄격한 기독교가 탄생하기 이전, 사람들의 명랑한 생의 열광. 마찬가지로 고대 로마의 오르기아의 비밀스러운 의식도 뒤섞인다. 고귀한 여자들에 의한, 여자가 지배하는 성의 난교. 귀족도 창부도 그 경계가 사라지고 여자들이 성을 차례차례 해방해나간다. 보름달의 투명한 빛이 그녀들을 강하게 비춘다.-152

고대 의식에서부터 그 기원을 갖는 달과 광기의 연결이, 소설의 클라이맥스에서 유리카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번뇌하는 동안,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죽음 앞에서 묘하게 냉정하고 시니컬한, 가히 광기 어렸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기자키 앞에서 생을 구걸해야만 했을 때.

너무나도 당연한 듯이 떠오르는 성에의 집착에 그녀가 무너져 내렸다면 그녀는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달의 유혹에도, 성의 갈망에도 넘어가지 않게 그녀를 지탱해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달밤에 읽으면 그 신비한 비밀을 좀 더 쉽게 벗겨낼 수 있을까.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마음 깊숙이에 나름의 질서를 구축하고 살아가는 기자키라는 인간의 속살에 한 치 더 가까이 다가간 유리카.

둘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었기에 그녀는 죽음의 문턱 앞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무너뜨릴 구석이 없는, 바늘 끝 하나 들어가지 않는 단단한 얼음같은 섬뜩한 인간.

사회를 이끄는 악의 축에서 흔들림 없이 살아가는 기자키.

그의 왕국에서 유리카는 한낱 봄날 한가하게 봄소풍 떠나는 노란 병아리 새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런 기자키 같은 인간을 만들어 내는 우리 사회는 또 얼마나 무시무시한가.

왕국.

인간의 악한 면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이다.

 

왕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