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가는 이야기, 특히 익살스러운 그림으로 친근한 윌리엄 스타이그의 그림책이다.

아이들과 여러번 이 책을 함께 읽었지만, 오늘처럼 동일시를 느끼며 마치 자신의 이야기처럼 예민하게 반응하는 아이를 만난 것은 처음이다.

 

글자없는 첫 페이지엔 웃으며 쳐다보는 여자애(누나)와 화난 표정인 스핑키가 나온다. 뒷 페이지엔 여전히 화난 표정의 스핑키와 마주보며 성을 내는 키 큰 남자(형)가 나온다. 그리고 그 옆 페이지엔 "너는 도대체...."라는 연상이 가능한 그림이 나오는데, 콧수염이 있는 어른(아빠)이 스핑키를 혼내는 장면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어른 앞에서 스핑키는 화를 억누르는 모습으로 서 있다. 그리고 뒷 페이지로 넘어가면 스핑키 홀로 씩씩거리며 걸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스핑키가 씩씩거리며 걸어가 배를 깔고 엎드린 곳은 풀밭이다. 때마침 노란 민들레가 피어있었지만 스핑키의 눈엔 보이지도 않는다. '화'난 감정에 사로잡힌 스핑키에겐 눈앞의 아름다운 풍경따위 보이지도 않는 것이다.  스핑키는 속으로 외친다. '우리 식구는 모두 머저리야! 말로는 날 사랑한다고 하면서, 순 엉터리야. 엄마만 빼 놓고. 얼마나 다행인지.. 스핑키가 마지막에 기대 위로받을 수 있는 엄마가 있다는 사실..

 

스컹크라고 불러서 미안해, 누나가 사과하는 장면으로 우리는 첫 장의 글자없는 그림속에서 두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을지 연상할 수 있다. 형도 다가와 사과하지만 스핑키는 화가 풀리지 않는다.

엄마는 스핑키의 화를 풀어주어야 겠다고 말하지만 아빠는 별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낸다면서 제풀에 지치게 그냥 두라고 한다.

 

이 페이지를 읽어주는데 귀기울여 듣고있던 한 아이가 책상에 엎드리면서 "우리 아빠도 똑같아요."한다. 형제가 넷인 집의 장남이며 장손인 녀석은 대우도 받지만 때론 부당하게 혼도 많이 난다면서.. 속상할 때 위로해주기는커녕 스핑키 아빠처럼 그냥 내버려두고 신경도 쓰지 않는다면서 서운함을 드러냈다. 동생들 때문에 부당하게 혼났을 때 감정이 어떤지, 아무도 배려해주거나 위로해주지 않을 때 감정이 어떤지 이야기를 나누는데 녀석의 큰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러면서 한마디 한다. "인생이 다 그렇지요 뭐!" 열한 살 아이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아닌데... 무엇이 녀석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휴~ 장손까지 겹쳤어요. 하면서 폭 한숨을 내쉰다. 마음이 아팠다.

스핑키가 깡통을 차버리는 장면에선 통쾌함을 느끼면서 크게 웃었다.

 

자신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가족들을 지켜보면서 스핑키의 마음속에 응어리는 이미 풀어져버렸다. 다만 그간 버텨온 것에 대한 자존심이랄까.. 빗속에서 어떻게 상황을 마무리할까 고민하는 스핑키의 표정이 사랑스럽다.

스핑키가 새벽에 광대로 분장한 후 아침을 준비해 식구들을 깜짝 놀라게 해준다는 이야기가 약간 억지스럽긴 하지만 아무튼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아이들과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핑키가 며칠밤을 밖에서 자면서까지 고집을 꺾지 않는 것, 화를 풀지 않고 버티는 것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들었는데,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한다가 대부분이었다. 만약 자신들이 스핑키처럼 행동했다면 당장 더 크게 혼이 났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지나치다고 느끼면서도 스핑키 가족들의 노력을 부러워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란 것, 감정이란 것이 얼마나 섬세하고 예민하게 돌보고 배려해야 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그림책이다. 형제간의 문제와 그것들을 둘러싼 가족들의 역동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슷비슷하다. 만약 누나와 형의 놀림을 받고 화가 난 스핑키를 아빠가 혼내는 대신 "화가 났구나" 라든가 "무슨 일로 기분이 상했니?" 라든지... 감정을 읽어주었다면 스핑키의 마음에 화와 분노가 자리잡지 않고 스르르 풀렸을 것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때론 녀석들이 감정을 표현하려 할때 말대꾸 운운하며 말문을 막아버렸던 기억들, 부당함을 호소하게 만들었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살짝 미안함도 느끼게 만드는 책이다. 좀 더 감정에 귀기울이는, 공감해주는, 지지해주는 그런 엄마가 되어야 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스핑키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마음속에 가라않아있던 슬픔과 아픔을 떠올리고 눈물을 보이던 녀석이 때때로 기대어 맘껏 투정부릴 수 있는, 남매들중의 첫 째라는, 장손이란 짐을 부려놓고 환하게 웃을 수 있기를.

부루퉁한스핑키, 윌리엄스타이그, 비룡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