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지요? 나 죽지않고 살아있다는 거 알려주려고 전화했어요. 그냥... 만나지 않아도 ’늘 거기, 그대로 있는 사람, 내가 가장 힘들 때 얘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지’하는 믿음이 있어서 든든했어요."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차분하고 교양있고 절제가 느껴지는 음성...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는 그녀의 뒤에는 너무나도 반듯한 남편이 있다. 보통의 남자들이 유연한 인간관계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술이나 약간의 취미생활? 등등.. 그러한 세계와 전혀 다른 자신의 성을 쌓고 살아가는 남편으로인해 그녀 또한 긴장된 삶의 연속이었다.

혼자 한 잔 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싸르르 전해지는 아픔.. 
그녀의 고독과 외로움이 통증으로 와닿길래 몸살로 힘들었지만 기꺼이 만날 의지를 가지고 물었더니 괜찮다고 했다. 목소리를 듣는걸로도 위안이 된다면서.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모시게 되면서 그녀의 우울은 깊어진것 같았다. 
"어머니가 꽃을 엄청 좋아해요. 꽃을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나는데, 가식적이란 생각이 들어서 그걸 사다 드릴수가 없어요. 지난 겨울에 화분을 다 죽였어. 죽어가는데도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그냥 죽게 내버려뒀어요. 그래놓고 지금 꽃을 사다드리면 너무 가식적인거 같아서..."
긴긴 지난 겨울동안 그녀는 싱그럽던 화분의 식물이 죽어가는데도 물을 부어줄 기력조차도 없었던 듯했다. 자신의 내부에서 시들고 비틀어져가는 자아를 돌볼 여력도 없었을테니 그녀 눈에 비친 식물에 맘을 쓰지 못한것은 당연한 결과다. 

한시간정도 통화를 했다. 그녀는 방에 있는 남편과 시어머니를 의식해 때론 지극히 작은 목소리로 얘기를 했다. 어딘지도 모르고 집을 나가서 헤매기도 하지만 기가막히게 귀가 밝으시다고 했다. 언젠가 상가앞 분식집에서 뵈었을 때 뽀얗던 피부의 노인이 떠올랐다. 노인이라고 하기엔 어중간한, 곱게 연세드신 어른으로 보였으나 젊은시절부터 갖은 고생을 하셨다고 했다.

설사 술을 입에 대지 않더라도 마주앉아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사는얘기를 할 수 도 있지않을까. 소주 한병에 매실원액 두 잔을 섞어 모두 아홉잔을 마셨다는 그녀는 사이다 한컵을 마신이처럼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다. 남편때문에 긴장하며 마시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그렇다고 한다.  

"이렇게 오래 통화하면 보통 남편들은 ’뭐하냐?’고 한마디 하잖아. 근데 전혀 그런거 없어요. 다 이해한대." 공허하게 들리는 웃음.
그녀의 외로움, 배려받고 싶은, 관심받고 싶은, 따뜻한 위로와 애정이 필요한 마음이 느껴졌다.

어머니가 한 달 후면 다른 형제집으로 떠나신다고 했다. 당신이 편하다고 느끼는 자식 집으로 가신다고...죄책감으로 힘들어하는 그녀가 안타까웠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식물들을 죽였다는 것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하며 죄책감을 느끼는 그녀가 자신을 괴롭히는 그런 생각에서 놓여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무리 정성을 들여 보살펴도 죽는 식물들은 있기 마련이다. 

"어쩜 그렇게 내 마음을 잘 알아요?" 그녀가 말한다.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먼저 달려가고 있다면서, 모델이 있어서 힘이 된다고 했다.

그녀와 이야기하며 몸살로 축 늘어졌던 나는 무언가 먹어야 겠다는 욕구를 느꼈고, 단골 치킨집이 전화를 받지 않아 자정이 넘은 시간에 찬밥을 데워 가볍게 야식을 먹었다. 삶은 계속된다. 고통스런 문제들이 파도처럼 밀려온다해도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 삶이다. 자신을 지키고자 굳게 방어벽을 쌓고 걸어 잠궜다면 그만큼 소통할 기회는 줄어들고 햇살도 비춰들지 못할 것이다. 

"지난 겨울이 너무 길었잖아. 봄이 되니가 좋아요. 버스타고 가다가 햇살이 좀 뜨거워도 그냥 있어. 해를 피하지 않고 그냥 햇살을 즐겨요."
 
그녀가 남편과의 사이에 쳐진 방어막을 허물고 봄햇살속에 수줍게 여린 싹을 틔우는 생명처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는 희망의 계절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