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황석영의 <<손님>>은 황해도 황천무가 양식을 통해 20세기 현대 한국 사회의 커다란 두 손님이었던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해원을 시도했다. 더불어, 전혀 어울릴 것같지 않은 환상성과 리얼리즘의 병치 혹은 공존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한국적 서사의 새로운 전형을 벌여놓은 바 있다. ‘헛것’들을 통해 산자와 망자의 질펀한 축제가 열리고 황해도 진오귀굿의 열두마당은 그것들이 생시로 가시화되는 가교 역할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황석영의 <<손님>>은 문학장 내에서 소설이라는 형식적 갈래가 감당해야할 역사적 부채의식을 어떻게 책임져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성실한 작가의식의 대안점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향후 한국 리얼리즘의 중추적 전형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4년여의 세월이 흐른 지금 <<바리데기>>를 통해 다시금 돌아온 작가 황석영은 역시 황석영이라는 탄성을 자아내기에 부족함 없는 큰 선물을 안고 돌아왔다.

  더욱이, <<손님>>을 통해 서사의 새로운 방법적 모색으로 그가 꺼내놓은 ‘환상성’이라는 카드는 보다 원숙한 필치와 구성을 기반으로 <<바리데기>>속에 용해되어 있었다. 더불어, <<손님>>의 주제적 공간과 시간이 한반도와 6.25를 중심으로 한 냉전시대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있었다면 <<바리데기>>는 9.11 테러와 이라크전쟁,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군사패권주의가 새롭게 그려내는 국제 사회의 어두운 역사를 배경으로 채택한다. 더욱이, ‘런던’이라는 서구제국주의의 ‘안동본가’(작가 인터뷰 가운데)를 주인공 바리가 살아가는 무대로 설정한 것은 멈출줄 모르는 차별과 억압, 폭력의 역사를 횡으로 가로질러 폭로하고자했던 작가의 치밀한 구성에 이미 의도된 바이다. 중국 혹은 일본, 너그러이 생각해야 프랑스 파리가 어울릴법한 황석영이 쌩뚱맞게 런던 유학을 선택한 사실이 궁금했던 독자들이라면 그가 왜 영국의 런던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소설을 통해 분명히 알게될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바리’는 청진에서 태어난 북한 여성이다. 비로소 어엿한 생명으로 인정받는 백일이 지나도록 제 이름 하나 갖지 못했던 7자매의 막내로 태어난 바리의 삶은 그야말로 비극의 연속이다. 하지만, <<바리데기>>를 통해 한 탈북 여성의 비극적 수난사를 목격하기 원했고 이러한 목적을 달성했다면 이는 분명 소설의 일정 부분만을 발췌해 읽었거나 혹은 독자로서의 성실한 책무를 다하지 못했거나 분명 둘 중 하나이리라. 이는 <<바리데기>>의 주인공인 ‘바리’가 단순히 북한이라는 기형적 독재체제의 희생양이 아니라 인류의 시원으로부터 발원했던 폭력적 지배구조의 희생양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압둘 할아버지의 발언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듯 그저 남보다 더 많이 갖고 누리려는 단순하지만 결코 만만치않은 인간 ‘욕망’의 문제. 그리고, 소설의 본문을 차지하는 대부분의 내용이 북한의 실상과 체제로부터의 이탈이 아닌 바리의 런던 체류에 집중되고 있다. 그리고, 이 런던이라는 공간은 중국, 파키스탄, 에티오피아, 베트남, 남아공, 동유럽의 여러 국가에 이르기까지 얼굴이 푸르거나 혹은 누렇거나 혹은 희거나 혹은 검은 이들이 모두 각자의 똬리를 틀고 공존하는 곳이기에 냉전 이후 더욱 분명해진 세계 양극화의 진상을 확인하기에 적격지임에 틀림없다.

  사실, 바리의 삶을 중심으로 작품을 읽는다면 작품의 플롯은 간단하다. 북한으로부터의 탈출과 가족과의 이별, 중국을 경유해 런던에 정착하게된 바리, 파키스탄인과의 결혼과 아프간내전에 얽힌 남편의 포로생활, 딸아이의 이른 죽음. 그러나, 한 개인의 수난사가 역사와 관계맺는 방식을 중심으로 보더라도 정작 서사의 주인공으로 내새우기에 바리의 삶의 아픔은 다른 인물들과 비교해 보아도 평이한 수준이다. 오히려 요하네스버그의 베티, 바리와 함께 런던에 밀항했던 중국인 샹, 런던으로부터 추방당하는 나이지리아 부인 등 바리가 경험했던 굴곡과 동일한 혹은 그 이상의 질곡을 경험한 인물들이 너무나 많이 등장하기에 바리는 그가 탈출과정에서 혹은 런던 생활에서 만났던 수많은 인물들 중 그들의 고통을 대변하는 하나의 상징적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바리’가 그의 환상 체험을 통해 생명수를 구하기 위해 떠나는 현세와 내세 사이의 중재적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배제했을 때 말이다. 그러나, 최소한 ‘바리데기 설화’를 통해 황석영이 구현하고자 했던 피바다, 모래바다의 뼈아픈 현실과 분열과 폭력의 시대를 종식시키기 위해이야기에 집중한다면 결코 한 여성의 수난사로 이 소설을 소개하는 과오는 범하지 않을 것이다.

  9시 뉴스데스크를 통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장면을 시청하며, 그리고 천안문에 운집한 수천 수만의 군중들이 탱크에 무참히 짓밟히는 것을 바라보며, 악의 화신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사담 후세인의 사형 선고를 목격하며 세계는 결국 평화라는 푯대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들은 언제부턴가 하나의 믿음에 가까웠다. 하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폭력과 차별, 억압, 편견, 기만, 질병, 기아, 강간, 납치, 살인을 이겨내기에 인간의 욕망은 여전히 크다. 참 크다. 과연, 인류를 구원할 마지막 ‘생명수’는 무엇인가? 서천 끝을 다녀온 바리 역시 구해오지 못했다던 그 생명수는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설화 마냥 이미 우리가 밥짓고 빨래하는 그 물이 생명수였던 것일까? 그렇다면 결국 파랑새는 없다? 우리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보인다는 투의 동화적 상상력에 인류의 평화를 내맡겨야 한다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