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신 작가의 글을 읽으면 뭔가 기분이 차분해진다.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듯한 연한 회색빛의 글. 나에게는 연한 회색빛의 느낌이다. 격정의 감정이 없이 슬픔도 기쁨도 조용히 흘러간다. 이 책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배경으로 한 서른여덟 편의 짧은 글들이 감겨있다. 계절에 따른다고 해서 글의 느낌이 차이가 나지 않는다. 봄이라고 싱그러워! 이런 느낌이 아니라 여름이라고 시끌벅적한 것이 아니라 외로움과 쓸쓸함, 그리움이 묻어나는 글들이다.

 

이 책의 서른여덟 편의 이야기들은 현실 이야기만이 아니다. 상상과 환상이 존재하는 장면들이 많이 등장한다. 신비로움을 더하는 장면들이 많다.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데는 작가가 등장인물들을 표현하는 방식에도 있는 것 같다. 등장인물 대부분은 이름이 없다. 나, 너, 그, 그녀의 호칭이 아니면 K, D와 같은 이니셜로 나타난다. 줄곧 이렇게 표현하다가 갑자기 <불가능한 작전>에서 '톰'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여름 고양이>에서 '봄', '여름'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여름 고양이>에서는 작가가 이름을 적어야 하는 요소가 있긴 했다. 봄과의 이별 후 여름을 만나고, 여름과 이별 후 가을을 만난다. 그런데 가을을 만나니 또 이별을 할까? 모든 만남에는 이별이 있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글에서는 주인공들의 이름을 알 수 없다. 그리고 존재를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현실인지 상상인지, 환상 같은 장면들도 많이 등장한다. 이야기의 화자는 사람이기도 했다가, 낡은 타자기가 되기도 하고, 낡은 자전거가 말을 하기도 한다. 스케이트를 타고 싶어 하는 코끼리를 위해 고민하는 동물들의 모습은 동화 같다. 길을 잃어버린 한밤의 동물원에서의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고, 세발자전거와 이별을 하려는 남자에게 세발자전거는 이별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말을 건다.

 

천사들이 등장해 인간의 '질투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아가 없던 물건에 지나지 않았던 타자기가 나의 주인, 그를 만나며 자아가 생기고 버려지는 과정에서 이야기하는 장면도 있다. 버려지는 인형들을 위한 '인형의 기사'모임이 이뤄지는 DOLL’S BAR도 기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행운과 불행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동전을 주운 남자의 이야기, 원하는 시간에 날씨를 살 수 있다는 설정도 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초콜릿 우체국>에서는 우체국 마크가 붙여진 초콜릿 가게인지 우체국인지 오묘한 장소가 등장한다. 누구에게 초콜릿을 보내고 싶으냐고 묻는 남자. 지금으로서는 보낼 곳이 없는 여자는 삼 년이나 오 년 전, 어쩌면 십 년 전 누군가에게 보내달라는 말을 한다. 지금의 내가 이전의 오래된 사람에게 초콜릿을 보낸다는 설정도 있다.

 

이렇게 환상인 듯한 요소들도 많이 등장한다면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잘 드러낸 글들도 있다. 우연히 만난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 먹었던 도시락. 그 후 그녀는 매일 도시락을 꼭 가져와 일주일에 두 번씩 데이트를 한다. 전화번호도 모르는 그녀, 그런데 절대 자신의 도시락을 먹지 않는다. 짧은 봄날이 지나가고 사라진 그녀의 비밀. 결혼을 약속한 그녀가 사라지고 회사까지 문을 닫아 실연과 실직을 동시에 당한 불행한 남자. 그는 사라진 그녀를 찾아 그녀의 집으로 간다. 그리고 그녀의 냉장고를 가득 해운 음식들을 먹어버리거나 치워버림으로써, 그녀가 돌아오는 길을 막아 버린다. 가득 찬 냉장고를 정리하기 위해 돌아올지 모르는 그녀를 정리하기 위해 막아버리기 위해서. <곰스크로 가는 기차>라는 글도 좋았다. 독일 작가의 단편소설의 이야기 속 주인공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를 통해 남자는 불행할까? 행복할까? 무엇이 인생의 소중한 가치일까 생각해보았다.

 

섬세한 감성이 비밀스러운 느낌을 준다. 감성적이지만 거부감이 일어나지 않고 현실과 환상을 왔다 갔다 하는 작가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모든 글에서 작가만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슬픔도 기쁨도 절망도 이별도 사랑도 격정적이지 않아서 더 좋다고 느껴지는 것 같다. 조용히 차분히 이야기를 따라 읽을 수 있었다. 현실과 환상을 오고 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