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남녀 교양인문학」본문 中 part 4. 역사상 최고의 정복왕은 누구?
김숙영 저 | 플럼북스 | 2012.03.28

동아시아를 호령한 대제국 고구려의 왕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릉비 ㅁㅁㅁ의 비밀

중국 지린성 지안현. 이곳에는 너비 약 1.5m, 높이 약 6.93m에 이르는 거대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중국에서는 '호태왕비'라고 부르는 이 비석의 정식 명칭은 '광개토대왕릉비'.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이 비에는 네 면에 걸쳐 모두 1,775자가 새겨져 있는데 고구려의 건국 신화와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 등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이 담겨 있다.
그런데 이처럼 귀중한 사료인 광개토대왕릉비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 중 하나인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오랫동안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임나일본부설’이란 4세기 후반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 지역에 진출하여 백제 신라 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했다는 설이다. 일본은 이를 교과서에도 실어 정설로 주입시키려 했지만, 임나일본부설은 터무니없는 역사 왜곡이 분명하다. 일본은 대체 어떤 근거로 이런 식민사관을 퍼트리려고 한 걸까? 그 중심에 바로 광개토대왕릉비가 있다.
광개토대왕릉비가 발견된 것은 1880년 전후로 알려져 있다. <용비어천가>를 비롯해 조선 전기의 문헌에서 간혹 '압록강 북쪽에 커다란 비가 있다'라고 언급한 경우가 있었으나 조선 후기까지 실제로 비를 확인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이유는 청나라에서 광개토대왕릉비가 있는 지역을 만주족의 발상지로 여겨 봉금제도(거주 금지 조치)를 시행해 오랫동안 이곳이 인적이 뜸한 폐허처럼 방치됐기 때문이다.
봉금제도가 해제된 후에야 비로소 이 거대한 비석이 발견되었고 제일 먼저 중국의 금석학자들이 비문을 해석하기 위해 탁본을 만들기 시작했다. 호시탐탐 대륙의 역사를 넘보던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행히도 광개토대왕릉비는 우리나라보다 중국과 일본의 손을 먼저 타게 된 셈이다.
문제는 오랜 세월 비석 표면을 덮고 있던 이끼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비석이 손상되었고, 이 때문에 훗날 연구에 많은 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비문의 내용 가운데 가장 큰 논쟁을 일으킨 신묘년에 일어난 일을 기록한 부분의 내용은 이렇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羅 以爲臣民
백잔신라 구시속민 유래조공 이왜이신묘년래 도해파 백잔ㅁㅁㅁ라 이위신민

해석하면 '백잔(백제)과 신라는 우리(고구려)의 속민으로 예로부터 조공을 바쳐왔다. 신묘년에 왜가 쳐들어오니 이에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했다. 그런데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신라로 쳐들어가) 그들의 백성으로 삼으려 했다.'

여기서 ㅁㅁㅁ의 세 글자가 확실하지 않아 논란이 됐는데, 이를 일본 사학계에서는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 백제,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했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일본의 해석대로라면 바다를 건너 백제,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은 주체는 바로 '왜', 즉 일본이다. 하지만 광개토대왕릉비의 주체는 누구인가? 당연히 고구려다. 고구려를 주체로 놓고 해석하면 바다를 건너 왜를 격파한 나라는 고구려가 된다. 이런 논리를 처음으로 주장한 이는 근대 민족사학자인 정인보다. 그는 문제의 세 글자를 연(連), 침(侵), 신(新)으로 채워 넣어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신라로 쳐들어가’ 그들의 백성으로 삼으려 했다고 해석하였다. 이 문장 바로 뒤에는 '6년 곧 병신년에 왕(광개토대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토벌했다'라는 기록이 이어지므로 정인보의 주장은 반박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해석이다. 이로써 일본의 터무니없는 임나일본부설은 힘을 잃게 되었고, 현재 학계에선 정인보의 이론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릴 때부터 용맹이 남달랐던 '호 장군'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해서 자세히 기술한 이유는 이 비야말로 초창기 고구려사와 고구려 19대 왕인 광개토대왕(374~412, 재위391~412)에 대하여 가장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는 중요한 사료이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정사서로 알려진 <삼국사기>에도 언급되지 않은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이 광개토대왕릉비에는 모두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