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소설을 봤다. 그것도 실화소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책들은 항상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으로 봐야해서 마음이 읽는내내 좋지 않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1972년 9월 27일 춘천경찰서 역전파출소 소장의 딸을 논둑에서 성폭행하고 목을 졸라서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던 정원섭씨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5년 7개월을 복역한 뒤 87년 크리스마스 이브날에 크리스마스 특사로 가석방 되었지.

물론 누명을 쓰고 들어간 전후사정에 대해서 이 책에서는 많은 부분을 할애하며 다루고 있는데, 모두가 짜놓은 시나리오대로 몰아가며

힘없는 일반인을 한 순간에 강간살해범으로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효 (젠장젠장젠장)

 

<도가니>에서도 날 그렇게 정의롭게 만들었던 사법부의 전관예우,

<뿔>에서는 한번 판결을 내린 사안에 대해서는 쉽게 번복하지 못하는 사법부의 존엄하신 Authority 유지를 통한 기가막힌 행실들은

나를 전의에 불타게 만들었다. 그나마 노무현정권 때의 과거청산위원회 같은 게 있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기회조차 얻지 못할 뻔...
 

 

책 마지막에 나오는 정원섭씨의 히스토리를 보니, 책에 나오는 아주 작은 에피소드까지도 모두 실화였더라능.

그나마 사건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했던 순옥이에 대한 얘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 있어도 없어도 이야기에는

많은 지장을 주지 않는 것 같다. 픽션의 요소가 가미되는 데에는 이런 신파같은 소재만큼 좋은 게 없겠지. 홍홍

근데 순옥과 관련된 이야기는 죄다 너무 자극적이라서 그런지, 이게 정말 실화라면 대박이겠다 싶었는데, 아닌 것 같아서

좀 다행이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역시 이런 사랑은 없는 것인가 하는, 뭔가 이러저러한 복잡한 마음이 듦. 푸하하

물론 19살짜리 소녀와 39살의 만화방가게 아저씨 사이이긴 했지만 이런 일들이 충분히 일어날 법 하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해는 안 갈 것 같아. 실화라면 아름다운 사랑으로 보이지는 않을 듯 하오. 뜨헐헐

 

사건 하나를 두고 누명을 벗니마니 하는 이야기들은 으레 그렇듯이 사건에 대한 내용이 반복반복 또 반복된다.

예전에 봤었던 일본추리소설 <사망추정시각>에서 거의 질리도록 사건이 반복되는 걸 봤었던 나는, 이번 책에서는 너무 질려하지 않으려고

강약을 조절해가면서 보았지. 으헤헤 그나마 이 책은, 그에 비한다면 좀 괜찮은 편임.

아 그리고 원섭씨에게의 무죄판결이 대법원에서까지 무죄로 이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그나마 한숨돌렸음.

(이렇게나 결과가 뻔한 사건을 가지고 또 작가가 시나리오 쓰듯이 엎치락뒤치락하면 아무리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용서못햇!!!!!)

 

 

아. 그리고 사건 자체와는 많이 관련 없지만, 여러명의 자식 중에서 유독 한 명이 눈에 들어오는 경우가 정말로 있나보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아픈 손가락은 없지만, 그래도 그 중에서도 덜 아프고 더 아픈 손가락은 있는 법이라고라고라. (흐음)

 

* 그나저나 이 책 출간될 당시에 책표지에 대해서 나도 투표에 참여했었는데, 내가 택한 표지가 아니네. 나의 안목은 그 정도인가.

 

 

 

 

 

●●●● 기억에 남는 글
 

"어떤 이유로든 이해하지 못한 감정이 생기면 그 생각의 감옥에 빠져 있게 되지 않소. 난 거기서 벗어나고 싶을 뿐입니다." 　(p.85)

이런 감정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 것 같아.

이유야 어쨌든 간에 이해하지 못할 감정이든 말이든 일이 생긴다면, 스스로 그것으로 만든 울타리에 들어간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고통은 비곗살 같았다. 지방을 빼고 나면 한결 가벼운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방심하면 어느새 다시 몸에 달라붙었다.

비곗살은 호르몬을 분비해 온몸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p.96)

내가 소설을 보면서 즐기는 것은 이런식의 비유.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것보다는 한방에 와닿는 게 덜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감정에 대한 묘사시, 제대로된 비유를 들어준다면야 그 어떤 직설적인 얘기보다도 더 확실하게 각인된다.

 

 

부서지기 쉬운 가족 관계에선 심각한 문제를 꺼내면 안 된다.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서로의 상처를 드러냈다.

그저 '날씨가 어떠냐? 오늘은 어떤 음식을 먹을까?' 이런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만 얘기해야 했다. 　(p.146)

대화가 방방 뜨긴 하는데, 너무 떠서 겉돈다고나 할까. 이런일이 간혹 있지.

꼭 부서지기 쉬운 가족관계라고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특정 이벤트(가족내 크고작은 사건사고) 발생시에는 어김없이 가족의 대화 패턴이

이렇지 않나. 꼭 소설속 정원섭씨네 가족같이 억장이 무너지는 최악의 상황이 아니더라도 말이지.....

 

 

"인간이 하는 사랑은 말이에요. 애증동시발병증이래요. 애정이 싹틈과 동시에 애증도 생기는 감정이요.

그래서 인간의 사랑은 신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의 몫을 훔쳤기 때문에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처럼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네요." 　(p.196)

이런 맹랑한 순옥이 지지배. 말 참 야물딱지게 잘 한다.

결국은 내가 그렇게 고통스럽고 힘들고 아팠던 이유도 프로메테우스 빙의되었기 때문이구만. 어허허 어떻게든 감당해야만 하는군

푸하하하 나도 순옥이 이론같은 합리화 쩔었었었었었었는데. (요즘은 현실에 눈을 뜨고, 슬슬 정신 챙기는 중 캬캬)

 

 

기사를 본 원섭의 이웃들은 평소 사람 좋게 생긴 그가 그런 일을 했다는 데 혀를 내둘렀지만,

'원래 선해 보이는 사람이 악독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라며 인간의 사악함에 치를 떨었다.

사건의 범인으로 누구나 불려갈 수 있는 상황이었고, 그런 상황에서 범인이 잡혀 마무리된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결국 그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안전한 자리를 찾았고 자신들을 숨겼다. 그들은 원섭이 정말 범인인지 의아해하면서도

그가 잡혔으니 이제 대문을 잠그지 않아도 된다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평화를 기대했다. 　(p.252)

갑자기 장자연사건이 생각난다. 사건이 터졌을 때는 모든 대중들이 그와 연루된 자들을 욕하며 손가락질하고 마녀사냥하기에 바빴지만

시간이 흐르고 이슈가 잠잠해지면서, 또 누군가가 (그 엄청난 리스트 중의 한명이) 돕박을 쓴 것 만으로도 만족하며 사그라들던 모습.

어쨌든 이런 패턴은 우리들 일반생활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본인이 루머의 주인공만 아니라면 어떤 말이라도 쉬워지는 것.

진실보다는 내가 편할대로 믿고픈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쯔쯧 (나는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없는 불편한 진실!)

 

 

원섭의 가슴속에서 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자신의 인생에서 순옥은 본질이었다.

아니라고는 했지만 순옥이 정의 내리는 원섭이, 그것이 원섭의 인생이었다. 　(p.280)

원섭이에게 순옥이 어떤 의미인가를 보여주는 문장들. 근데 이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남자란 동물은(표현 죄송함돠)

자기가 속았거나, 본인이 생각했던 게 착각이었다는 게 밝혀지는 즉시 본색을 드러낸다. (=상처를 지대로 받는다는 표현으로도 대체가능)

원섭씨도 280페이지에서 이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다음 페이지에서 순옥이에게 모욕작렬하는 말을 내뱉어. 아 짜증나 순옥이 맘도 모르고

 

 

'악마가 사용하는 최고의 속임수는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라고 한 모들레르의 말을 떠올렸다. 　(p.284)

무슨 말인지 한번에 와닿지 않다가, 와닿고 보니까 완전 후덜덜 무섭다. 헝헝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