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선택이 아니라 내가 선택당한 기분이다. 그냥 지나치려는데 마르케스의 이름 덕분에 '한 번 읽어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고, 여기에서 칠레의 근대사를 필름에 담음 미겔 리틴이라는 영화감독과 시인 파블로 네루다, 정치인 아옌데의 흔적, 군사정권의 참혹한 시대를 볼 수 있어서 칠레는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단지 한-칠레 FTA로 과연 칠레산 포도나 와인을 싼 가격에 먹을 수 없는 나라로 기억되는 게 아니라.

 

    1985년에 국외추방자 명단에 있던 영화감독이 칠레의 모습을 담기 위해서 변장을 하고 들어와  해외 여러 팀과 현지 반체제인사로 꾸린 영화지원팀과 함께 칠레를 알린다. 대한민국과 분명히 비슷한 정치적 흐름을 겪었는데, 그들은 71년에 파블로 네루다를 82년에 라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노벨상 수상자로 세상에 칠레 문학 혹은 남미 문학을 알렸다는 게 우리와 다르다. 어떤 차이가 그 흐름을 만들었을까? 이건 K-POP이 표절의 대세로 가느냐 아니냐의 현 시점과는 다르다. 나라가 문화를 장려하는 차원이 아니라 문화가 사회를 인식하는 망원경이자 현미경이 되는 것. 그래서, 고은 시인은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시를 읽지 않는 대한민국에 있어서 그 길이 멀고 멀어 보인다.

 

    이 글은 감독의 녹음테이프를 작가의 문체로 현장감 가득하게 그려놓았다. 그래서, 마치 그 시대 그 공간에 칠레의 공기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게다가 마지막에 시나리오도 일부 있어서 어떤 영화로 감독이 그렸을 지 상상하게 된다.

 

    곳곳에서 긴장과 진땀이 흐르기도 한다. 이미 영화로 상영되었으니 감독이 무사히 탈출했을 것을 알면서도 곳곳에서 누가 도청하거나 관련자가 경찰이나 군부에 신고하지 않나 하는 불안감이 배어있다. "우리가 칠레에 인공위성을 통한 교통 통제망을 설치하기 위한 문제로 칠레 통신부 장관과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우루과이에서 왔다는 기가 막히게 급조된 이야기를 했다(p.204)." 그 긴장감이 이런 기지에서 웃음이 된다.  

 

    참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리고 정치권력은 세력이 바뀌어도 여전히 국민의 마음을 사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의 정부다(p.112)."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그들이 산티아고 거리에 쏟은 피를 대신하는 목소리일 지도 모른다.